[르포]홍콩의 자신감 "中 군투입? 오려면 빨리 와라…두렵지 않아"

주최측 추산 '170만 명' 참가…다시 평화 앞세운 홍콩 대규모 시위

18일 집회를 위해 빅토리아 공원에 모인 시위대가 운동장 위에 앉아 집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사진=김중호 특파원)
◇ 18일 아침 고요 속에 긴장감 도는 빅토리아 공원

홍콩섬 코즈웨이베이(Causeway Bay)에 자리잡은 빅토리아 공원의 일요일 아침은 한산하고 평온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원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과 태극권 수련에 열중인 할머니들만이 띄엄띄엄 있었지만 공원 안에는 유독 경찰들의 모습이 많이 포착됐다.

공원에서 경찰의 등장이 부쩍 잦아진 것은 18일 오후부터. 이곳 빅토리아 공원에서 대규모 송환법 반대 집회가 예정됐기 때문이다. 지난 6월 200만 집회를 성사시켜 한껏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민간인권전선'은 이날 오후에 또 다시 대규모 집회를 예고했다.

지금까지 기대 이상으로 홍콩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온 민간인권전선이지만 최근 계속된 시위대와 경찰의 정면 충돌로 시위 참여 동력이 떨어져가고 있다는 지적이 이는 가운데 여는 집회여서 이번 집회를 준비하는데 느끼는 압박감도 상당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돼 왔다.


집회 주최 측은 이번 집회 전면에 '평화'와 '비폭력'을 앞세웠다. 민간인권전선은 이날 집회가 '화이비(和理非) 집회'가 될 것이라며 처음부터 평화 집회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전날 홍콩에서 열린 시위에서도 이전과 같은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을 찾아볼 수 없었다.

200만 명이 참여한 지난 6월 16일 집회 이후 최대 규모를 예고한 주최 측 입장에서 노약자들을 집회에 참여시키기 위해 '평화 집회' 약속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최근 인근 중국 광둥성 선전(深圳)에 집결한 무장경찰에게 홍콩 진입의 명분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 송환법 반대 집회 1시간 전, 검은 물결 몰아치는 빅토리아 공원

집회 시작 1시간 전인 이날 오후 1시부터 검은 옷의 사람들이 빅토리아 공원과 인접한 코즈웨이베이와 티엔하우(TianHau) 지하철역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면서 민간인권전선의 전략이 맞아 떨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검은 옷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성별이 골고루 분포돼 있어 특별히 시위를 주도하는 계층이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전 가족이 집회에 참여하는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18일 빅토리아 공원에서 열린 '송환법 반대 집회'에 참석한 홍콩 시민들(사진=김중호 특파원)
시위대는 일사분란하게 공원 광장 중앙의 연단을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집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시위대는 일사분란한 모습을 보여줬다.

집회 주최측의 요구에 잘 따랐으며 중간중간 시위대 누군가가 구호를 외치면 어김없이 같이 따라하며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집회가 시작할 즈음에는 빅토리아 공원과 인근 도로들이 검은 옷의 물결로 가득찼다.

◇ 홍콩 정부 믿지 않는 시민들…중국 군 진입 가능성에 "올테면 빨리 들어오라"

캐리 람(林鄭月娥) 홍콩 행정장관이 "현 의회 임기가 끝나는 2020년 7월이 되면 해당 법안(송환법)은 소멸되거나 자연사 수순을 밟을 것"이라며 법안의 소멸까지 언급했는데도 시위대는 여전히 "송환법 철회"를 외치고 있었다. 왜 그런 것일까.

18일 빅토리아 공원에서 열린 '송환법 반대 집회'에 참석한 홍콩 시민들(사진=김중호 특파원)
시위에 참여한 홍콩 시민들에게 직접 물어봤다. 시민들은 외국 기자가 말을 걸어오자 친절하게 답해줬지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과 사진을 찍는 것만은 끝까지 난색을 표하며 현 시국의 분위기를 대변했다.

시위에 참여한 50대 남성 왕 모씨는 "송환법은 매우 나쁜 법이지만 정부는 단지 법처리를 연기했을 뿐"이라며 캐리람 장관의 소멸론을 일축했다. 자신의 이름을 레이라고 밝힌 20대 청년은 캐리람 장관이 송환법의 소멸을 이야기했다는 말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직도 정부는 송환법과 관련된 문건들을 지니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홍콩의 시위 정국이 끝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송환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콩 경찰에 대한 분노도 여전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회에 참여한 20대 여성 리우 모씨는 "지난 7월 21일 몇몇 사람들이 홍콩 시민들을 공격했지만 아무도 경찰에 의해 기소되지 않았다"며 "우리가 오늘 거리에 나온 이유"라고 설명했다.

친구들과 함께 집회에 나온 20대 여성 에이미씨는 시위대의 폭력 때문에 강경 진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경찰의 주장을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했다. 에이미씨는 "경찰들이 7월 초부터 모든 시위에 최루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며 "먼저 폭력을 사용한 것은 그들"이라고 강조했다.

18일 빅토리아 공원에서 열린 '송환법 반대 집회'에 참석한 홍콩 시민들(사진=김중호 특파원)
많은 시민들은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이 중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20대 청년인 리 모씨는 "홍콩 정부는 중국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중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리씨는 하지만 자신은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를 지지하고 있다며 홍콩 독립과는 선을 그었다.

홍콩 조슈아 웡(Joshua Wong)과 함께 데모시스토 당을 이끌고 있는 아그네스 초우(Agnes Chow)는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홍콩 시위대가 중국 국기 등을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중국이 책임을 안 지고 현 사태를 방치하고 있는데 대해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중국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독립파로 분류해 버리고 적대시한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인민해방군을 투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 50대 남성은 "최근 여러 가지 루머가 많이 돌고 있다"며 "확실한 정보를 접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20대 리 모씨는 "중국군이 들어온다고? 제발 그래줬으면 좋겠다. 군이 들어온다면 나는 죽거나 집으로 돌아가 잠이나 자고 있을 것이다"라며 "그들이 두렵지 않다"고 외쳤다.

◇ 집회 중간 장대비가 쏟아져도 시위대수 줄지 않아

이날 집회에서 발언에 나선 민간인권전선 천쯔제(岑子杰) 간사는 집회를 평화시위로 만들자고 거듭 촉구했다. 천 간사는 "오늘 하루 평화와 이성으로 비폭력 시위를 이루자"며 "홍콩인들은 용감하고 싸움에 능하지만, 또한 평화와 이성, 비폭력을 통해 캐리 람 행정장관이 우리의 요구에 응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8일 완차이 지하철역 부근에서 센트럴 방연으로 행진하고 있는 송환법 반대 시위대(사진=김중호 특파원)
2시부터 시작된 집회 도중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졌지만 시위대는 기다렸다는 듯 우산을 꺼내들었을 뿐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집회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는 내내 시위대는 자리를 지켰다.

가두 행진이 시작됐고 시위대는 빅토리아 공원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인파가 몰리면서 공원을 빠져나가는 데만 1시간 넘는 시간이 걸렸다. 더운 날씨와 장대비 속에 머물러야 했지만 시위대는 시종일관 구호를 외칙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시위대는 빗 속에서 도로로 나가 목적지인 센트럴로 향했다. 순식간에 빅토리아 공원 인근 도로는 색색의 우산으로 채워졌고 시민들의 구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경찰은 이날 민간인권전선이 빅토리아 공원에서 차터로드까지 행진하겠다는 계획을 불허했지만 시민들이 행진에 나서자 거리를 두고 크게 관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18일 완차이 부근 길가에서 시위대가 식수와 간단한 간식 등을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사진=김중호 특파원)
계속해서 비가 내렸지만 행진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시위대 일부가 완치이의 경찰 본부와 애드머럴티의 정부청사 건물에 레이저 포인터로 빛을 비추기도 했으나, 경찰과 충돌은 없었다. 이날 저녁까지 이어진 집회는 주최 측 의도대로 평화시위로 끝나면서 4주만에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빅토리아 공원과 인근 틴하우, 코즈웨이베이 등에서 벌어진 송환법 반대 시위에 주최측 추산 170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도심 시위가 '비폭력'으로 끝나면서 중국의 무력개입 우려에 대한 급한 고비는 넘겼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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