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기대도 욕망도 없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 같은 혜정(한해인 분). 제대로 멋지게 살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비루한 현실이 발목을 잡아서 일이 안 풀린다고 여겨 괴로워하는 효연(전소니 분). 지난 15일 개봉한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감독 유은정)에는 정반대 같은 두 인물이 나온다.
둘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다. 살아 있어도 유령과 다름없었던 혜정은 정말로 유령이 된다.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수양(감소현 분)과 함께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씩 찾아낸다. 효연은 자기 앞길에 방해가 되는 상황이든 사람이든 참지 못한다. 자기 방식으로 돌파하고 해치운다.
평행선 위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유은정 감독은 혜정에게 '혜정 안의 효연'이라는 면을 부여했다. 그래서 관객들은 두 사람의 닮은 점을 발견하며 영화를 보는 재미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밤의 문이 열린다'로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을 내놓은 유은정 감독을 만났다. 유 감독은 '어떤 인물에 더 이입된다'는 관객들의 다양한 반응을 듣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고 전했다.
◇ 혜정과 효연, 다른 듯 닮은
'밤의 문이 열린다'는 아주 잔인한 장면이 나오진 않지만, 공포·판타지라는 장르 영화로서의 오싹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한다. 혜정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깜빡이는 전등은 왠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을 선사한다.
누군가 세상을 떠나 유령이 될 때 재로 없어지는 장면에 관해서는 "먼지로 흩어지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고 답했다. 환상적이면서도 묘한 느낌이 잘 드러난 것 같다고 했더니 유 감독은 "VFX(Visual Effects, 시각적인 특수효과) 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라며 웃었다.
가장 동적인 장면은 사채업자 광식(이근후 분)을 사정없이 칼로 난도질하는 효연(전소니 분)의 모습이다. 유 감독은 "효연이란 인물이 물리적으로 힘이 더 약한데도 전광식이란 사채업자를 어떻게 공격했을까 고민했다. 너무 억지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광식이 과연 죽은 건지 묻자, 유 감독은 "효연이 어떻게 죽여야지 하고 딱딱 계획을 세운다기보다는 불안정하고 몰리는 상태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봤다. 전광식을 죽인 건 실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효연이 살인자가 되지 않는 엔딩"이라며 "예전에 사람이 살인하면 자신의 영혼도 죽이는 일이라는 구절을 본 적이 있다. 혜정은 (수양의 아버지인) 전광식을 살리면서도, 효연이 살인자가 되는 것도 막아줬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효연은 경제적 곤궁함 때문에 빚을 지고, 사채에까지 손을 댄다. 그래서 언니 지연(이자민 분)이 사는 방에 숨어 지내는 처지다. 유 감독은 효연을 "아웃사이더에서 중심으로 나가고 싶어 하다가 미끄러진 인물"이라며 "(효연은)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을 잘(제대로) 선택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 건 특권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누군가는 혜정에게 더 이입하고 누군가는 효연에게 더 이입하더라고요. 효연한테 이입 못 한다는 분은 살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다 저러진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소니 배우도 (효연을)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좀 더 감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혜정의 마음속에도, 우리 마음속에도 효연 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혜정은 외부에서 자극이 오거나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안전한 공간을 찾아서 도망가는 케이스지만, 마음속 어딘가엔 이런 걸 다 해치우고 싶다는 생각도 있을 것 같아서요. 상반된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혜정 안에도 효연 같은 면이 있는 거죠."
◇ 유은정 감독이 느낀 한해인-전소니-감소현이라는 배우
전소니는 장편영화 '여자들'을 인상깊게 보고 배역을 제안했다. 한해인은 동료인 우경희 감독의 '증언'이라는 단편 작업을 할 때 현장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얼굴을 봤다고. 한해인과 감소현은 오디션을 보고 '밤의 문이 열린다'에 합류했다.
유 감독은 "해인 배우는 초반에 인사 나누고 얘기할 때도 뭔가 느낌이 혜정 같다고 느꼈다. 캐릭터 분석을 어떻게 했는지, 생각한 걸 한 번 보여달라고 했는데 연기로 보여주는 게 확실했다"라고 말했다.
"두 분(한해인-전소니)이 공통적으로 저를 좀 믿어주신 게 제일 고마웠어요. 아마 캐릭터에 되게 집중하셔서 그럴 수도 있는데, 두 분 연기 스타일도 '밤의 문이 열린다'의 혜정과 효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해인 배우는 디렉팅 드리면 연기하실 때 속으로 혼자서 많이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한 번 더 하고 싶다거나 모니터 보고 싶다거나 하지 않았어요. 소니 배우는 제가 '이런 느낌인 것 같아요'라고 하면 일단 본인 에너지를 갖고 (연기를) 했어요. 모니터하고 싶다는 얘기도 자주 해 주셨고요. 효연은 되게 감정적인 상태에 빠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도 (배우가) 머리로 뭔가를 계산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 것 같아요."
아역인 감소현을 두고는 "수양이가 9~10살 정도 나이대여서 그 나이대 배우들 오디션을 보려고 했는데, 너무 어리거나 그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주로 왔다. 너무 어린 배우들은 캐릭터에 대한 이해나 저와의 소통이 조금 어려운 게 있었다. 더 큰 배우들은 연기는 잘하지만 12~13살은 유령을 믿기에는 조금 커버렸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감소현은 오디션 중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지원자였다. 유 감독은 "그 당시 9살이어서 나이대도 맞았고, 오디션 때 주변에 물건을 놔뒀는데 알아서 동화책을 집어서 연기하더라. 그게 좋았다"고 전했다.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으며 개봉 전부터 '관객의 지지'를 받았던 '밤의 문이 열린다'. 이 작품은 유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남다르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한마디를 부탁했다.
"(웃음) 혹시, 자기가 혼자라고 느끼거나 외롭거나, 세상을 너무 믿을 수 없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영화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시면 좋겠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