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보내주고 많은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은 양금덕 할머니는 지난 1944년 5월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1년 5개월 정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한 달 월급 30원을 주겠다는 말을 믿고 주소까지 남겨두고 돌아왔지만 70년이 지나도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밥 한 번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상황에 화장실조차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지각을 하거나 업무량이 줄어들면 폭행이 시작됐다.
지난 1945년 10월 해방이 된 사실조차 모르고 고국에 돌아왔지만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근로정신대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였고 결혼도 쉽지 않았다.
결혼 이후 양 할머니가 근로정신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남편은 집을 나갔고 10년 만에 다른 부인이 낳은 아들 셋을 데리고 돌아왔다. 양 할머니의 남편은 근로정신대는 곧 위안부라고 생각했고 "너는 더러운 짓거리하고 나는 그러면 안 되냐"등의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압류한 미쓰비시 중공업의 상표권과 특허권을 판매하는 매각 절차에 나서자 오히려 일본 정부는 대법원 배상 판결을 빌미로 경제 보복 조치를 취했다.
올해로 90세가 된 양금덕 할머니는 광주 서구 한 비탈길에 세워진 남의 명의의 땅 무허가 주택에 60여 년째 지내고 있다.
연일 35도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지만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설치해준 에어컨은 전기세가 아까워 틀지 못할 때가 많다. 점심은 인근 경로당에서 주로 해결하고 저녁은 김밥이나 우유 등으로 간단히 때우기 일쑤다. 채 50만 원이 안 되는 노령연금과 생활보조금으로는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74번째 광복절을 맞아 양 할머니는 사과 대신 경제 보복을 선택한 일본 정부의 적반하장식 태도를 두고 다시는 가슴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젊은 세대가 더 노력해주길 부탁했다. 양금덕 할머니는 "일본에게 지배당해 동물 취급당하는 일이 없도록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해주길 바란다"며 "다시는 일본에 절대 당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양금덕 할머니는 "아베는 우리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며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울 생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