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임 첫 해 광복절 "日 과거사 직시" 지난해 "내부 분단 이념 극복"
문 대통령은 취임 첫 해인 2017년 8월 광복절 경축사에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발전에 방점을 찍으면서,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 문제 인식에 부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한일관계도 이제 양자관계를 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라며 "과거사와 역사문제가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지속적으로 발목 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우리가 한일관계의 미래를 중시한다고 해서 역사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오히려 역사문제를 제대로 매듭지을 때 양국 간의 신뢰가 더욱 깊어질 것"이라며 급격한 우경화로 치닫는 아베 내각의 올바른 과거사 인식 필요성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북한이 장거리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등으로 동북아 안보 불안이 심각한 시기임을 감안해 문 대통령은 "당면한 북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서도 양국 간의 협력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유연한 입장도 동시에 밝혔다.
지난해 취임 후 두 번째 맞는 광복절에서 문 대통령은 일본 정부를 겨냥하기보다는 국내 분단 이념 극복을 '키워드'로 꼽았다. "분단은 대한민국을 대륙으로부터 단절된 섬으로 만들었다", "분단은 안보를 내세운 군부독재의 명분이 됐고, 국민을 편가르는 이념갈등과 색깔론 정치, 지역주의 정치의 빌미가 됐다",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반드시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 등으로 채워졌다.
지난해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성공리에 치러내고 9·19 평양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개선을 통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구축을 위한 내부 토대 마련에 주력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 8·2 긴급국무회의 당시만 해도 강경한 메시지 담길 것으로 예상
하지만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는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이 아닌 '위자료'"라며 "이는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배 침략전쟁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다"고 판결하면서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조치가 시작됐고, 올해 한국과 일본은 정면 충돌하고 있다.
특히 지난 2일 아베 신조 총리가 각의(국무회의)를 열어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국가인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하면서 문 대통령의 대일(對日) 메시지는 강경해졌다.
같은 날 문 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우리) 정부는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 조치에 상응하는 조치를 단호하게 취할 것이다. 일본이 경제 강국이지만 우리 경제에 피해를 입히려 하면 우리도 맞대응할 방안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또 "가해자인 일본이 적반하장으로 큰소리치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겠다. 일본 정부의 조치에 따라 우리도 단계적으로 대응조치를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일본의 조치로 우리 경제는 엄중한 상황에서 어려움이 더해졌으나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백색국가'에서 제외한 당일, 청와대 연설비서관실에서는 문 대통령의 올해 광복절 경축사 연설문 작성을 거의 마무리했지만,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를 비판할 내용이 더 추가될 수 있다는 '전운(戰雲)'도 감돌았다.
당장 이틀 뒤 청와대 참모진들도 일본 비판에 가세했다. 윤도한 전 국민소통수석은 "수출 규제 이유에 대해서도 하루가 다르게 말을 바꾼 점을 감안하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거짓말이 반복되면 상습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관료들의 무도함과 습관적 거짓말(을 보면) 사태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날을 세웠다. 사토 마사히사(佐藤正久) 외무 부(副)대신이 후지 프로그램에서 문 대통령을 향해 "'도둑이 뻔뻔하게 군다'(적반하장)는 품위 없는 말을 쓰는 것은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무례하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청와대 최종건 평화기획비서관도 이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우리는 다시는 지지 않을 것'이라는 문 대통령의 한 마디는 우리의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한 역사선언"이라며 "작심하고 작심한다. 고단한 반도의 운명을 바꾸는 데 벽돌 하나를 얹고, 다시는 어두운 시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조국 전 민정수석은 페이스북에 "일본의 국력은 한국보다 우위이지만 일본이 한국을 정치적·경제적으로 능멸한다면 한국은 정당방위를 할 수밖에 없다"며 "이순신 정신, 의병과 독립군의 경험 등이 한국인의 DNA 속에 녹아 있다"고 경고하는 글을 일본어로 올리기도 했다.
불화수소 수출 규제 등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가 본격 시작된 지난달 24일 부산에서 열린 '규제특구, 지역주도 혁신성장의 중심' 시도지사 간담회에 참석한 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들은 인근 '거북선' 식당에서 오찬을 함께했고, 강기정 정무수석과 고민정 대변인이 식당 상호를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청와대 내부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국민들도 우리 경제를 흔들려는 일본의 경제보복에 단호하면서도 두 나라 국민들 사이의 우호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의연하고 성숙한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 독립운동의 길에 나선 우리의 선조들은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13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당신을 기억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독립유공자 및 독립유공자 후손 청와대 초청 오찬 행사에서 다소 톤을 낮췄다.
문 대통령은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는) 양국이 함께해온 우호·협력의 노력에 비추어, 참으로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라면서도 "정부는 우리 기업과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해가며 외교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날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도 문 대통령은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우리 대응은 감정적이어선 안된다. 결기를 가지되 냉정하면서 근본적 대책까지 생각하는 긴 호흡을 가져야 한다. 적대적 민족주의를 반대하고 인류애에 기초한 평등과 평화 공존의 관계를 지향하는 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우리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대한 단호한 대응 기조는 유지하면서도 강대강(强對强) '치킨게임'이 한일 갈등의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현실적 고민이 담긴 셈이다.
대신 "우리 선조들은 100년 전 피흘리며 독립을 외치는 순간에도 모든 인류는 평등하며 세계는 하나의 시민이라는 사해동포주의를 주창하고 실천했다", "우리 국민께서 보여주신 성숙한 시민의식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양국 국민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민주인권의 가치로 소통하고 인류애와 평화로 우의를 다진다면 한일관계의 미래는 더욱 밝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외교적 해법을 열어놓은 것으로 이같은 기조는 광복절 경축사에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는 최근 아베 내각의 우경화 행보와 과거를 직시하지 못하고 한국인들에 상처를 주는 언행을 지속하는 일본 정치인에 대한 따끔한 비판은 담길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국인들에게 상처를 준 과거사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아베 내각과 일본 정치인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는 빠질 수는 없을 것 같다"며 "경고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회복을 위한 주문도 담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극일(克日)을 위한 장기적 청사진인 '신한반도체제' 구상도 밝히며 남북 평화경제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구체적 방안 등도 언급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해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만큼, 북한을 향해 연이은 도발을 멈추고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를 진전시키자는 메시지와 동시에 광복 74주년을 함께 축하하자는 제안도 할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