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드라마 '퍼퓸' 속 한지나는 이성적이고 자기 일에 철저한 프로다. 8년 만에 자신의 모델 에이전시를 국내 최고로 키워낸 실력자인 한지나는 서이도(신성록 분)의 사랑을 갈구한다. 겉으론 화려하고 반짝이지만 속으로는 남모를 외로움과 아픔을 안고 있다.
한지나는 얼핏 보면 그간 배우 차예련이 드라마 속에서도 보인 '차도녀' 이미지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간 드라마에서 보여준 차가우면서도 악한 이미지보다는 '멋진 여성'의 이미지가 강하다. MBC 드라마 '화려한 유혹'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차에련은 여태와는 결이 다른 캐릭터를 공백 없이 소화해냈다.
2004년 영화 '여고괴담'으로 연기자로 데뷔한 이후 차예련은 어떻게 보면 연기 외적인 걸로 먼저 평가되거나 이야기돼 왔다. 그러나 영화 '퇴마: 무녀굴'에서는 방송사 PD 주혜인 역을 맡아 자신의 이미지를 깨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이후 '화려한 유혹'에서 보여준 행보도 새로움과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배우 차예련'의 도전이 담겨 있다.
4년 만의 복귀는 차예련에게 '신인'의 마음을 일깨웠다. 그리고 '감사함'을 알려줬다. 지난 4년의 세월, 함께하게 된 가족, 그리고 '퍼퓸'을 통해 차예련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그런 차예련을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다시 배우로 돌아오게 된 소감을 들어봤다. 인터뷰 내내 밝고 쾌활하게 웃는 차예련은 자신의 웃음 소리를 '예능'에서나 볼 법한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 드라마 '퍼퓸', 차예련에게 '신인시절'의 떨림을 선사하다
4년 만의 복귀에 차예련은 마치 '신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굉장히 떨리고 설레고, 거의 신인에 돌아가서 첫 작품을 하는 느낌으로 시작했어요. 4년 만에 하다 보니 떨리더라고요. 긴장도 되고, 괜히 민폐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많이 들었죠. 그러다 보니 첫 촬영가기 전 3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현장에 적응하는 데도 2~3주 정도 걸린 거 같아요. 주변에서 다들 잘 할 수 있을 거다, 해왔던 게 있으니 금방 적응할 거라고 했는데, 거의 막바지에는 적응했어요. 처음에는 진짜 신인의 마음으로 했던 거 같아요. 카메라 앞에서 잘할 수 있을까, 연기할 수 있을까, 어디를 봐야 할 지도 잘 모르겠고. (웃음) 긴장도 하고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도 컸어요. 그래도 여태 했던 게 있어서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하는 거였지' 하면서 적응한 거 같아요."
차예련의 복귀 드라마 첫 장면은 1회 패션쇼 장면이다. 패션쇼 진행 장면을 먼저 찍고 난 후 자신의 촬영 분량이 돌아와서 한참을 기다렸다. 긴장이 풀려가나 싶은 순간 촬영에 들어갔다. 차예련은 "갑자기 어떻게 할지 모르겠더라. 예린이(고원희 분)와의 장면을 찍는데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하는지, 예린이를 봐야 하는지 혼자 생각을 많이 했다"라며 "첫 대사를 할 때 정말 떨렸다"라고 말했다.
차예련에게 '신인'의 감정을 떠올리게 한 드라마 '퍼퓸'의 대본을 받아본 순간 차예련은 재밌고 남다른 대사에 반했다. 그는 "일단 대본이 너무 재밌었다. 대사 하나하나가 세련되면서도 남달랐다"라며 "특히 서이도 대사를 보면서 배우들끼리 어떻게 이런 표현, 이런 대사를 하는지 진짜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라고 말했다.
차예련은 "결말은 모르고 시작했는데, 5~6부까지는 진짜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재밌게 읽었다"라며 "복귀작인데 너무 다운되고 무겁고, 누군가 괴롭히는 악역을 하는 것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지나는 멋있기도 했고 스토리가 패션 이야기이면서도 코믹한 부분도 있었다. 여러 가지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을 거 같아서 선택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극 중 은퇴한 톱 모델이자 모델에이전시 이스트림(E-stream) 이사인 한지나는 날카로운 이성과 프로의식의 소유자다. 또한 8년 만에 에이전시를 국내 최고로 키워낸 실력자다. 과거 모델 시절에도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패션계를 주름잡던 톱 모델로, 어찌보면 남부러운 것 없는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시놉시스에는 한지나를 '한국의 미란다 커'라고 표현해 놨다.
차예련은 "드라마를 통해 보인 스토리가 없어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한지나는 세계적인 패션쇼에 한국인 최초로 메인 모델을 서기도 한 인물"이라며 "그런 유명하고 멋있는 여자에게 이름 없는 디자이너 서이도가 찾아온다. 한지나로 인해 서이도는 유명해지고, 한지나도 서이도(신성록 분)의 메인 뮤즈가 됐지만 알고 보니 그간 서이도가 만들어 온 옷은 첫사랑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한지나는 내게 진심으로 줬던 옷이라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모두 첫사랑을 위한 것이었다. 나를 위한 옷은 만들지 않았다. 이처럼 한지나에게도 어떤 연민이 가는 부분이 있었는데 분량이 많지 않아서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라며 "재희(하재숙 분)의 변신과 서이도와의 관계를 풀다 보니 지나에 대해 많이 보여주지 못해 아쉽긴 하다. 나는 조금 더 보여줄 수 있었는데 덜 보여줘서 아쉽지만, 그래도 즐거웠다"라며 웃었다.
◇ '외모 지상주의', 그리고 '드라마 제작환경'에 대한 차예련의 소신
드라마의 결말은 빤한 클리셰를 따라가지 않는다. 서이도는 향수를 뿌리고 날씬하고 예뻐진 패션모델 민예린(고원희 분)이 아닌, 민예린의 본 모습이자 자신의 첫사랑인 민재희(하재숙 분)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결말 전에도 서이도는 민재희를 보고 그가 자신의 첫사랑임을 알아차린다.
차예련은 "사실 서이도랑 재희와의 엔딩도 좋았지만 중반부에 둘이 마주쳤을 때의 장면이 좋았다. 물론 언니(하재숙)가 분장해서 그렇지만 눈빛으로 첫사랑을 알아낼 정도로, 모습이 화려하지 않고 예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 좋았다"라며 "아름다움의 기준은 본인이 갖는 것 같다. 누가 봐도 뚱뚱하고 자기 남편이 구박하고 못생겼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그냥 사랑인 거다. 본연의 모습을 사랑해주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차예련은 "외모와 상관없이 좋은 에너지를 갖고, 항상 빛나는 사람이 있다. 그게 예쁘고 아름다운 것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이 항상 제게 기대하는 기대치가 있어요. 예쁘고 몸매 좋고 옷 잘 입고, 그런 기대치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어서 평생 다이어트를 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들을 보면 그렇게 아름답고 예뻐 보이더라고요. 저도 사실 평상시는 못 꾸며요. 오늘은 일하러 나오니까 이렇게 입고 나왔지, 평상시에는 챙겨야 할 아기용품도 많고, 청바지에 티셔츠에 운동화 신고 모자 쓰고 그러고 다녀요. 일하러 나올 때만큼만 배우 차예련인 거죠. 아기랑 있을 때는 그냥 '엄마'예요. 엄마가 되니까 다른 감정이 생기는 거 같아요. 내가 몰랐던 감정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매일 이야기하고 있죠. 제가 철이 들었나 봐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 오랜만에 돌아온 드라마 촬영 환경은 예전과 달랐다. 예전에는 스케줄표를 보며 끝날 시간을 대략 짐작해야 했다면, 지금은 언제 촬영을 시작하면 언제 끝나는지 시간이 정해졌다.
그런 환경을 보며 차예련은 "우리가 모두 바라던 환경"이라고 말했다. 차예련은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다. 좋은 환경일 때 복귀한 거 같다"라며 "예전에는 밥 먹는 시간도 제작부나 감독님이 정했다면, 이제는 식사도 막내에게 언제 먹을까 하는 걸 물어보는 등 모든 막내 스태프까지 존중해주는 환경이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할리우드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타임테이블이 나오면 1분 1초도 틀리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그런 시스템 구축이 덜 되어 있어서 굉장히 힘들었는데 지금은 예전에 비해 좋은 환경인 거 같다"라며 "여전히 힘든 부분은 있지만 조금씩 나아지면서 막내 스태프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러다 보니 현장 분위기도 좋아졌다. 18년 전에 비하면 정말 환경이 좋아진 것 같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제가 이 정도의 위치에 만족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고 아기를 낳으면서 자존감이 낮아졌다고 해야 하나,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시 저라는 사람을 찾아주고 반겨주는 걸 보면서 그래도 내가 여태까지 잘 유지하며 해왔다는 생각에 감사했어요. 다시 찾아주고 배우로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해요. 예전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거 같아요. 한 아이의 엄마고, 남편도 배우라는 게 항상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신랑과 항상 좋은 사람이 되자는 말을 많이 해요. 배우로서도 현장에서 막내 스태프들의 이름까지 다 외워서 불러주고 있어요. 작지만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려고 해요. 그렇게 좀 더 어른이 되는 거 같아요."
◇ 배우 차예련, 배우로서의 스펙트럼 확장을 꿈꾸다
차예련은 지금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야기했다. 그는 "비록 시청률 대박은 치지 못했지만 '퍼퓸'도 잘 끝났고, 나도 복귀를 해서 내 존재를 알렸다"라며 "사람들이 날 아직 찾아준다는 느낌도 받고, 좋은 남편과 너무 예쁜 아이도 있다. 그래서 꼽자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차예련이 배우로서의 현재에 안주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직 배우로서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차예련은 "사실 내가 맡은 캐릭터가 웃을 일이 잘 없다. 그런데 나는 좀 더 밝고 에너제틱한 모습이 있다. 코미디를 할 수도 있고 망가질 수 있는 자신도 있다. 액션도 잘 할 수 있다. 운동하는 걸 좋아하고 운동신경도 있다"라며 "세련되고 도시적인 이미지가 구축되어 있긴 한데, 한 번은 이런 이미지를 깨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차예련은 일종의 '기로'에 서 있다. 배우로서 다양한 역할, 다양한 장르로 확장해 나갈 시작점이 될 기로 말이다. 그에 대한 생각과 고민은 늘 있지만 스트레스로 생각하지는 않으려 한다.
"스트레스로, 갈증으로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대신 다 똑같은 성격과 직업, 똑같은 인물은 아니니까 내가 다르게 연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신랑도 '이 캐릭터는 무조건 마누라야, 이걸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역할이 들어오는 거잖아. 평생 할 수 있어'라고 말하더라고요. 그게 되게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이게 나 아니면 안 돼, 감독님이나 제작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시니까 저에게 오는 거로 생각하게 됐어요. 그거에 감사함을 느끼는 날이 오더라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