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왜소해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훗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하는 전봉준 장군. 배우 최무성은 녹두장군과는 달리 182cm에 달하는 키를 지녔다. 이 같은 외형적 차이부터 실존하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데 최무성은 굉장한 부담을 가졌다. 그러나 함께 출연한 백이강 역 배우 조정석은 최무성이 연기한 전봉준 장군을 보며 '꺼지지 않는 심지' 같다고 느꼈다. 그만큼 최무성이 그려낸 '전봉준 장군'은 많은 이들에게 뜨거운 울림을 전했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최무성은 "과분하고 영광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부담이 됐다. 실존 인물인 데다 그동안 많이 안 다뤄졌던 인물이라 걱정이 많이 됐다. 덩치가 너무 커 보일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 역사의 소용돌이 속, 지도자이자 한 인간이었던 '전봉준'을 그리다
드라마 '녹두꽃'을 보며 당시 민중의 아픔을 알았고, 드라마를 통해 현재를 알게 됐다는 반응이 많았다. '권력'이라는 특권을 가진 이들의 횡포와 탐욕 등 드라마가 그리는 당대의 현실이 2019년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이 시작되며 드라마 속에서 기시감을 느끼는 시청자도 많았다. 그렇게 드라마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창구였다.
"전봉준 장군과 백성들이 최소한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체적으로 그려집니다. 작가님이 연구를 많이 해서 사실에 따라 쓰려고 노력하셨어요. 다만 이강과 이현(윤시윤 분)이 등장하며 극화된 부분도 있지만, 사실적인 부분을 많이 가져가려고 노력했죠. 일본에 의해 고통당했다는 데 그치기보다 그 시절 백성들이 어떻게 모여서 험난한 시절을 어떻게 이겨냈는가,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게 단순히 분노의 대상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이 갔으면 하는 바람이죠."
'녹두꽃' 속 전봉준은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행태를 두고 보지 않고 봉기를 주도한다. 세상을 바꿔 보고자 한 신념을 지닌 전봉준은 백성들의 뜨거운 분노를 아우르는 동시에 현실 앞에서는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도 있는 냉철한 정치가적 면모를 보였다.
최무성은 연기하며 늘 '균형'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냉철한 정치가로 있어야 할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사에서도 그런 부분에 대해 감독님에게 의논했다. 어려운 부분은 너무 위에 있는 사람이 되면 안 됐다"라며 "실제로 전봉준 장군은 서민적인 부분이 있었고, 되도록 살인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정치가인 부분도 있지만, 인간적이면서도 평범한 사람으로서 생활했던 부분도 있어서 밸런스 조절이 중요했던 거 같다"라고 말했다.
특히 가상의 인물인 백이강과 백이현 사이에서 '전봉준'이라는 실존 인물로서의 균형감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최무성은 "굉장히 개성 강한 주인공 사이에서 내가 완급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을 많이 했다"라고 덧붙였다.
균형 속에서도 최무성은 전봉준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려내고자 했다.
"견뎌라. 마음이 타들어 가 숯덩이가 될 때까지, 수백 명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악귀가 될 때까지. 병사는 피 흘리며 죽고, 장수는 피가 말라 죽는다. 그리 죽으면 되는 것이다." ('녹두꽃' 10회 중 전봉준의 대사)
최무성은 "엄청난 일을 겪은 사람이 지도자로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 이 사람은 이성적 판단을 하지만 감정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있을 거로 생각해서 감정적인 접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라며 "'병사들은 피 흘리며 죽고, 장수는 피가 말라 죽는다'는 대사는 전봉준이라는 사람이 그 당시 겪은 인간적 갈등을 한마디로 표현한 거 같다"라고 말했다.
◇ 방송, 즐겁게 보는 가운데 역사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힘
백이강을 연기한 조정석은 극 중 전봉준 장군을 보며 '꺼지지 않는 심지'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전봉준을 연기한 최무성 역시 "'꺼지지 않는 심지' 같다는 표현은 너무나 정확한 표현 같다"라고 말했다.
"녹두장군 대사 중에 '내가 죽어야 너희 형 같은 의병들의 투지가 산다. 그래야 이 나라가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거죠. 그리고 '나 전봉준 죽어서도 이 나라를 지켜볼 것이오'라는 대사도 있었는데, 내 시체조차 나라를 위해 쓰겠다는 것이죠. '꺼지지 않는 심지'라는 표현이 잘 맞는 거 같아요. 그리고 전봉준에 대해 새롭게 느낀 건 되게 인간적인 면모가 컸다는 겁니다. 집강소를 차리면서 전봉준이 '대세는 분명 우리에게 있소. 허나,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은 이 나라 민초들이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과업, 정치요'라는 대사를 하죠. 체계적으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고민했던 거 같아요. 그런 부분에서 새롭게 느낀 점이 있죠."
전봉준에게 백이강은 앞날이 기대되는 젊은이이자 동시에 전봉준이 믿고 동지가 될 수 있는 친구였다. 백이현(윤시윤 분)을 보면서는 이상은 다르지만, 시대의 아픔을 같이 겪고 있는 사람,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의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고하를 막론하고 동지로 여기는 마음, 자신과 다른 길을 선택한 인물에 대해서도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게 최무성이 연기한 전봉준이었다.
최무성은 자신도 고등학교 1학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녹두꽃'을 하게 된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고1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앉혀놓고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건 애들한테 안 먹히는 거 같다. 슬쩍 보여주고, 본 것을 통해 자기가 '그렇구나' 생각하는 게 좋은 거 같다. 나도 그렇게 현명하지 않아서 그 방법이 뭔지 모르겠다"라며 "그래서 이런 작품이 있는 것 같다. 즐겁게 보는 가운데 울분도 느끼고 역사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방송이나 영화의 어떤 몫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일조했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자부심은 촬영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지난 5일 방송된 '우금티(우금치) 전투' 장면에서 보조출연자들은 각각 동학군, 그리고 조선군과 일본군이 되어 온몸을 불사르며 열연을 펼쳤다.
최무성은 "'우금치 전투'는 정말 처절했다. 신경수 감독님이 또 촬영하기 전에 한 말씀 하신다. '이 전투가 어떤 느낌이고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었고, 잘 한번 표현해 봅시다'라고 하는데, 그게 또 감동이 있고, 전파가 됐다"라며 "단순히 퀄리티 좋은 걸 뽑아 보자는 게 아니다. 진심이 느껴졌다. 마치 정말 그 시절로 돌아가서 우리가 움직이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있었다"라고 당시 현장을 전했다.
이어 그는 "이름 없는 의병들의 모습이 더 감동이 있었다는 평도 봤는데 나도 동감한다. 보조 출연자분들과 같이 연기하는데, 그분들께서 '컷'하고 난 후 '눈물이 저절로 나지 않아?'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걸 봤다. 아마 내 연기보다 더 좋았을 것"이라며 "드라마가 이런 힘이 있구나, 그런 부분이 재밌는 부분이구나 하는 걸 느꼈다. '녹두꽃'은 정말 다 같이 만드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실제 있었던 아픈 역사다 보니 그런 게 있었던 거 같다. 실제로 현장에서 합심해서 열심히 했고, 뿌듯한 느낌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싶은 배우로서의 욕심
'녹두꽃' 마지막 회에서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사진가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전봉준 장군의 사진을 그대로 묘사한 장면은 시청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진은 전봉준 장군이 1895년 2월 27일 서울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 법무아문으로 이송되기 직전의 모습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무성은 "절묘한 연출이었다. 실제 사진이 등장하면 판타지가 깨질 수 있는데, 신 감독님이 과감하게 넣어서 깜짝 놀랐다"라며 "당시 감독님이 이 장면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인지에 대해 피력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봉준 장군께서 카메라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좀 더 처연한 느낌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 나름대로 일을 하고는 가는데, 조금 더 백성들과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서글픔이 담긴 거 같았다"라며 "뷰파인더를 백성이라 생각하라는 자인이(한예리 분)의 말을 따라갔다. 백성들을 보라고 했는데, 그 대사에서 아련한 슬픔을 느꼈고 그 느낌을 담았다. 사진을 따라 하려 하기보다는 그때 그 진실한 감정이 중요한 거 같아서 감정을 담으려 했다"라고 말했다.
문자로서, 기록으로서 존재하는 역사가 아닌 사진으로까지 남은 가까운 역사, 묵직한 한 역사 속 전봉준이라는 인물을 살다가 빠져나오는 심경은 어떨까.
최무성은 "시간이 좀 지나면 어느 순간에 울컥할 거 같다"라고 말했다. 작품이 끝났을 때 여운을 오래 갖고 가는 편이 아니라 지금은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울컥할 것 같다고 말했다. 동시에 뿌듯함도 느낄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역사의 흐름에 녹아들어 몇 달을 보낸 것만큼 많은 것을 느끼고 고민하고 생각한 작품이었다.
고민만큼 다시 한번 연기자로서, 배우로서의 숙제도 생겼다. 늘 부족함을 느끼고, 그 한계를 넘어가려는 것, 그것이 최무성이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태도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최무성은 "허허허"라며 소탈하게 웃었다.
"기본적으로 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배우라면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싶은 순수한 욕심이 있어요. 연기에 낙담하고, 다시 배워야 하는 거 아냐 할 때가 있죠. 항상 부끄러워하고 겸손한 게 맞는 것 같아요. 자칫해서 오만해지면 연기가 이상해지고, 감독님들도 그걸 너무나 잘 아세요. 그리고 보는 사람도 느끼죠. 그래서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부족하니까요. 전봉준 장군 역을 하면서도 그랬고요. 그럴 때마다 숙제가 하나씩 생겨요. 내가 뚫고 나가야 하는 게 생기는 거죠. 다들 갖고 있잖아요. 자기 한계, 목표지점.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걸 하나하나 뚫고 나가야 한다는 게 제 목표죠. 그게 제 연기자로서의 목표랄까요? 태도라고 이야기하는 게 더 맞겠네요. 그게 기본이 되어서 잘되면 더 좋아지겠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