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로망, 위안소=설렘" 뉴라이트 日찬양서적 파문

이우연 "강제징용 개념적 조작…조선인에게 징용은 로망"
주익종 "1965년 한일협정은 박정희 굴욕외교 아냐…日과 과거사도 청산"
이영훈 "일본인 위안부, 전쟁특수로 한몫 잡아…성노예로 보기 힘들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일부 뉴라이트계열 학자들이 한일관계에 대한 우리 국민의 통념을 넘어선 서적을 펴내 파문이 일고 있다.

문제의 서적은 '반일 종족주의'라는 제목의 책으로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 등 보수 진영 학자 6명이 지난 10일 출간했다.

이 책은 "친일은 악, 반일은 선이며 이웃나라 중 일본만 원수로 감각하는 것"을 반일 종족주의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일본이 식민지배 35년간 한국인을 억압·착취·수탈·학대했고, 일본이 이를 반성·사죄하지 않았다는 통념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빌미로 지난 1일 경제보복 조치에 나섰다.

저자 가운데 한 명인 이우연(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책에서 강제징용이라는 말 자체가 개념적 조작이고, 이 판결 역시 역사왜곡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징용 자체가 강제이기 때문에 징용이라고 하면 된다. 굳이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건, 징용(1944년 9월~1945년 4월)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뤄진 노무동원이 강제연행이라고 주장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징용 이전의 모집과 관알선을 통한 조선인의 일본행은 그들의 자발적 선택이었다. 이후 징용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10만 명 정도였는데, 이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고 적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이 강제노동·노예노동에 시달렸다는 것에 대해서는 "임금을 정상적으로 지불했고, 업무 중 구타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이는 일본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생활은 자유로웠다. 어떤 이는 조선여인이 있는 특별위안소에서 월급을 탕진하기도 했다"고 썼다.

또 조선인들이 근로환경에서 민족차별을 당했다는 건 역사왜곡이며, 조선인의 산업재해율이 높은 건 탄광의 노동수요와 조선의 노동공급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한국은 청구할 게 별로 없었고, 이 협정으로 일본과의 과거사가 청산됐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저자 중 한명인 주익종(이승만학당 교사)은 "1951년 9월 체결한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의거해 한국은 식민지피해 배상을 주장할 수 없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피해 배상이 아닌 한국측 재산 반환을 청구한다는 입장이었다"며 "박정희 정부의 7억 달러 주장에 일본이 인정한 금액은 7천만 달러에 불과했다. 애초부터 한국은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고 적었다.

그는 "한일 양국은 1962년 김종필-오히라 회담에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방식으로 타결했다. 한국 측이 실제 청구할 게 크지 않았고, 22억 달러 어치의 재한국 일본인 재산을 이미 취득한 점을 고려한다면 박정희 정부가 역대 정부와 달리 굴욕·매국 외교를 한 게 아니다. 양국간 최선의 합의였다"고 주장했다.

또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을 비롯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됐다"며 "'징용 노무자에게 정신적 피해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위안부가 강제연행된 것과 일본군의 성노예로 부려졌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공동 저자인 이영훈은 "위안부가 관헌에 의해 강제연행됐다는 건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 개인의 증언 등에서 비롯한 심각한 오해"라며 "여인들이 공창으로 향할 때 가난과 폭력이 지배하는 가정을 벗어나 도시의 신생활로 향하는 설렘이 없지 않았듯 위안소로 향하는 행렬도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위안부 역시 전쟁특수를 이용해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사람이었다. 이들을 세상 물정에 어두운 무능력의 존재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위안소나 주변을 함부로 이탈할 수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 부자유는 직업적 특성으로 볼 수 있다"며 "선택의 자유가 전혀 없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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