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의 불법적 식민지배 부정이 한일갈등의 근본 원인

日 반발로 한일청구권 협정에 못담아, 대법원이 근본적 문제제기 한 것
불완전한 '1965년 체제' 극복해야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이 미쓰비시 측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와 가족들이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1965년에 못질을 했어야 했는데, 2005년에도 못한 것이 이제 터져 나온 거다."

한 일본 전문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에 대해 이같이 표현했다.

어디까지 치달을지, 어떤 해법이 있을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한일갈등은 근원적으로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담지 못한 1965년의 한일청구권 협정에서 비롯됐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은 배상과 직결된 문제로 일본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1965년 일본과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은 1910년까지 이르는 모든 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해석을 놓고 한국 정부는 한일합방도 무효라고 본 반면 일본은 합방은 유효하게 지속됐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됐다는 것으로 맞섰다.

일본은 식민지배의 불법성 자체를 부인한 것으로 이같은 기본조약의 틀 안에서 맺어진 한일청구권 협정도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청구권협정 1항은 '유무상 5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한국에 제공한다', 2항은 '이로써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구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일본은 후에 5억 달러의 성격을 '독립축하금'으로 표현했고, 한국이 요구해온 청구권 문제는 이것으로 없던 일이 됐다는 주장을 펴왔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최종 해결됐다는 일본의 주장은 이에 근거한다.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 억달러로 1975년부터 1977년에 걸쳐 징용 사망자 8천여 명에게 미지불 임금에 대한 보상으로 92여억원을 지급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문제는 40년 동안 덮어져왔지만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요구로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하면서다.


이에 정부는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해 한일청구권협정의 법적 효력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한 논의 끝에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추가 보상을 결정했다.

우선 공동위는 "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한일 양국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청구권협정이 배상과 무관함을 분명히 했다.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명시했다.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도 한일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일갈등의 기폭제가 된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공동위는 "한일협상 당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해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했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간 무상자금산정에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고 해석했다.

또 "청구권협정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달러는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돼 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3억 달러에 강제징용 피해보상 성격이 담겨 있는 것으로 봤지만, 불법 식민지배에 따른 '배상'과는 다른 '보상'으로 표현했고, 또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거나 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다는 표현은 없었다.

오히려 "청구권협정이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힌 점,"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밝힌 점에 비춰 개인청구권은 살아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볼 여지를 남겼다.

노무현 정부는 1975년의 피해자 보상이 충분치 못한 데 따른 도의적 책임으로 2007년 지원 관련 법률을 제정했고, 이에 따라 2015년까지 국외 강제징용 피해자 7만 2천여 명에게 6100여억 원이 지급됐다.

정부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체결 이후 강제징용 문제를 협정의 효력 범위 안에서 '상황관리'를 했다면, 2012년과 2018년의 대법원은 그 외부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그에 따른 배상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셈이다.

2012년 5월 대법원은 "청구권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다"며 "이런 상태에서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 등으로 인한 개인 손해배상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3년 7월 파기환송심에 이어 지난해 10월 30일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그대로 인정한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일부 전문가들은 "대법원이 한일관계에 대형 폭탄을 던졌다"고도 하고 "1965년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고도 말하고 있다.

개인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소멸됐다는 아베 신조 내각의 주장은 과거 일본 정부는 물론 일본 사법부의 판단과도 배치된다.

1991년 8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나이 순지 외무성 조약국장은 '한일 청구권 협정은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가진 외교 보호권을 서로 포기한 것이지 개인의 청구권을 국내법적 의미에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2007년 4월 중국인 징용피해자의 소송을 기각하면서도 '개인 청구권 자체는 소멸하지 않았다'고 명시했었다.

아베 내각이 2차 무역보복을 준비하는 등 한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데에는
식민지배 불법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퇴행적인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일본은 1993년 고노 담화→1995년 무라야마 담화 →1998년 한일공동선언을 통해 식민 지배에 대한 인식을 확대해오다 2010년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의 강제성을 인정했었다.

당시 민주당 소속이었던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로, 그는 2010년 8월 10일 식민지배가 한국민들의 의사에 반해 강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2015년 종전 70주년 담화에서 "전쟁에는 아무 관계 없는 우리의 자녀나 손자, 그 뒤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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