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9일. 외교부와 사법부의 부적절한 면담 자리에 우연찮게 끼게 된 김모 사무관은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가 법과 법조계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김 사무관은 사법연수원 36기로 법무관을 거치고 대형 로펌에서 약 2년간 변호사로 일하다 외교부에서 경력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5부(박남천 부장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공판에 김 사무관을 증인으로 불렀다. 김 사무관은 외교부와 법원행정처가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대해 논의한 면담 자리에 참석한 인물이다.
해당 면담은 양 기관에서 각각 3명씩 참석했다. 외교부에서는 조태열 제2차관과 박모 국제법률국장, 김 사무관이, 법원행정처에서는 임종헌 차장과 행정처에 근무하는 판사 2명이 나왔다. 임 전 차장 등이 직접 외교부를 방문했고 면담은 조 차관 사무실 옆 접견실에서 이뤄졌다.
김 사무관은 "재판에서 의견을 낼게 있으면 양해를 구하고 제출을 한다든지 하는 과정이 있고 이는 대부분 법정안에서 이뤄진다"며 "법정이 아닌 곳에서 협의를 하는 것을 목격하고 매우 놀랍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공개되지 않은 자리에서 (판사와의) 만남이 이뤄진다는 것 자체가 제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며 "법원은 공정성을 위한 노력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본 것"이라고 덧붙였다.
면담 자리의 주제였던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은 양승태 대법원 시절 법원행정처가 청와대 등을 상대로 '거래'를 시도한 것으로 의심받는 재판 중 하나다. 강제징용 피해자가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012년 대법원은 1·2심 판단을 엎고 피해자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사건을 받은 서울고법은 2013년 피해자 승소 판결을 내렸고 이에 대해 일본 기업이 대법원에 재상고했다.
외교부는 이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이해관계자였다. 박근혜 정부는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일본 기업에 패소 판결을 내릴 경우 일본과의 외교 문제 등을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법원행정처는 제3자인 외교부가 재판에 정식으로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김 사무관은 "의견서는 제출하고 싶은 사람이 제출하면 되는 것인데 법원에서 먼저
(의견서를 내라고) 요청하는 모습이 생소했다"며 "법정 외에서 이런 대화가 이뤄지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이후 김 사무관이 해당 면담을 정리한 보고서에는 양 전 대법원장이 퇴임하기 전에 대법원이 강제징용 사건에 대해 선고할 수 있도록 협조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이러한 제안을 먼저 한 것은 외교부가 아니라 법원행정처 쪽이었다. 아래는 김 사무관이 면담 당시 임 전 차장의 발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판결 관련 대법원의 새로운 논의 전개를 위해 계기가 필요한 바, 여러 전후 배상 문제 처리 관련 외국 사례를 제출해주면 결과를 장담할 순 없으나 이를 기초로 전원합의체 회부를 추진하려고 함."
"외교부로부터 의견서 제출 절차 개시 시그널을 받으면 대법원은 피고(일본 기업) 측 변호사로부터 정부 의견 요청서를 접수받아 이를 외교부에 그대로 전달할 예정."
"4년 전 내려진 판결을 바로 뒤집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현임 대법원장 임기중 결론이 내려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외교부가 의견서를 늦어도 11월 초까지 보내주면 가급적 이를 기초로 최대한 절차를 진행하고자 함."
면담 이후 김 사무관은 기존에 강제징용 사건 업무를 전담해오던 정모 사무관에게 보고서를 넘겨주면서 "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사무관은 "더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고 그 날 면담에서 느낀 위법성을 고백했다.
재판에서 양 전 대법관 변호인 측은 사법행정기관인 법원행정처의 역할은 재판업무를 하는 법원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변호인은 "증인도 변호사이니 물어보는 것인데, 판사와 (사건 관계자가) 직접 통화하긴 힘들지만, 재판 행정업무를 담당하시는 분과는 통화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김 사무관은 "행정실무 직원과 통화하는 것은 그냥 문의이지 (당시 면담과 같은) '절차적 협의'가 아닐 것"이라며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