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게레로를 보고 연상되는 이미지는 '괴수'다. 190cm로 큰 신장에 팔다리가 유독 길었다. 1996년부터 2011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게레로는 공을 때려 부술 것 같은 강력한 스윙을 자랑했다. '배드볼 히터'로도 유명했다. 타자가 치기 어렵거나 치면 안되는 코스의 공을 때려 안타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고 때로는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겼다.
그는 타격할 때 장갑을 끼지 않았다. 담장 앞에서 던진 공은 포수를 향해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갔다. 너무 세게 던져 포수의 키를 넘긴 적도 있었다. 그는 마치 야구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게레로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다. 92.89%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통산 타율 0.318, 449홈런, 1496타점을 올렸다. 2004년 애너하임 에인절스 시절 MVP를 받았고 9번이나 올스타전 무대를 밟았다.
게레로는 2007년 올스타전 홈런더비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알렉스 리오스, 앨버트 푸홀스, 라이언 하워드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올스타전 홈런왕에 등극했다.
게레로에게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아들이 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 소속의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는 현역 시절 탁월한 재능을 자랑했던 아버지를 보며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
타고난 유전자는 남달랐다. 188cm의 큰 신장에 체구는 아버지만큼이나 우람하다. 파워는 최상급. 아버지만큼 호타준족은 아니지만 선구안만큼은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프로 입단 후 팀내 부동의 유망주 1위였다. 게레로 주니어가 만 19세였던 지난해 마이너리그를 초토화시키자 그를 하루빨리 메이저리그 무대로 올리라는 토론토 팬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게레로 주니어는 마침내 올해 4월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러자 토론토 뿐만 아니라 리그 사무국 차원의 스타 마케팅이 본격화됐다. 현재 성적은 타율 0.249, 8홈런, 25타점(61경기 출전)으로 기대보다는 조금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는 이미 스타 대접을 받고 있다.
하루는 그가 토론토에서 낮경기를 치르고 그날 밤 미국프로농구(NBA) 토론토 랩터스의 플레이오프 홈경기를 관람하러 갔다. 작전타임 때 관중석에 있는 게레로 주니어가 소개되자 팬들은 마치 카와이 레너드와 카일 라우리에게 보낼 법한 우렁찬 함성과 박수를 건넸다.
게레로 주니어는 9일(한국시간) 미국 클리블랜드 프로그레시브필드에서 열린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였다.
만 20세114일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홈런 더비 참가자가 된 게레로 주니어는 새로운 역사에 도전했다.
2007년 아버지의 곁에서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던 그가 과연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부자(父子)의 홈런 더비 우승을 완성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렸다.
도전은 실패했다. 1,2라운드를 뚫고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올해 전반기에만 홈런 30개를 때린 '슈퍼 루키' 피트 알론소(뉴욕 메츠)에게 졌다.
하지만 올해 홈런 더비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게레로 주니어였다. 공을 때려 부술 것 같은 강력한 스윙과 압도적인 파워, 지치지 않는 체력까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게레로 주니어는 맷 채프먼(오클랜드)을 만난 1라운드에서 제한 시간동안 29개의 홈런을 쳤다. 홈런 더비 역사상 단일 라운드 최다홈런 신기록이 나왔다. 프로그레시브필드에서 넘기기가 쉽지 않은 왼쪽 담장 밖으로 수많은 장타를 날렸다. 비거리도 엄청났다.
류현진의 팀 동료 작 피더슨(LA 다저스)을 상대한 2라운드는 홈런 더비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먼저 방망이를 잡은 게레로 주니어는 2라운드에서도 29개의 홈런을 때렸다. 지켜보던 피더슨은 한숨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피더슨의 파워도 대단했다. 홈런 29개를 쳐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게레로 주니어는 추가 1분의 연장전에서 무려 8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날렸다. 그의 승리를 의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피더슨 역시 8개의 홈런을 쳤다. 3번의 스윙으로 우열을 가리는 '스윙오프' 연장이 시작됐다.
게레로 주니어가 있는 힘을 다해 홈런 1개를 쳤다. 피더슨도 1개를 기록했다. 두 번째 '스윙오프'가 진행됐고 게레로 주니어는 3번의 스윙으로 홈런 2개를 뽑아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피더슨이 홈런 1개에 그치면서 승부가 갈렸다.
피더슨이 마지막 타구의 궤적을 확인하고 고개를 떨구자 게레로 주니어가 달려가 그를 안고 격려했다. 두 선수는 홈런 더비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야구 팬들에게 알렸다. 클리블랜드 팬들은 타구가 담장 밖으로 나갈 때마다 흥분하며 즐거워했다.
게레로 주니어는 방송 인터뷰를 통해 "피더슨은 정말 굉장한 선수다. 우리가 환상적인 쇼를 만들어냈다"고 소감을 밝혔다.
게레로 주니어가 2라운드에서 기록한 총 40개의 홈런은 단일 라운드 신기록이다. 1라운드에서 수립한 자신의 기록을 곧바로 깬 것이다.
홈런 더비 결승에서는 예선에 비해 홈런이 덜 나오는 경향이 있다. 선수들도 사람이라 지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물'은 달랐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초반에는 홈런을 많이 때리지 못했지만 두 차례 타임 요청 이후 몰아치기 시작했다.
홈런 22개. 피더슨과 혈투를 벌이고도 홈런 더비 결승전의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치우는 괴력을 발휘했다.
1,2라운드를 합하면 총 게레로 주니어는 이날 하루동안 무려 91개의 대포를 쏘아올렸다. 역시 신기록. 2016년 지안카를로 스탠튼(현재 뉴욕 양키스)의 종전 기록 61개를 뛰어넘었다.
하지만 결승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피트 알론소는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에 23개의 홈런을 때려 우승을 확정지었다. 알론소가 세 라운드를 치르면서 때린 총 홈런수는 57개다.
거액의 상금 100만 달러(약 11억8천만원)는 알론소의 몫이었다. 올해 데뷔한 알론소의 연봉은 55만5천 달러로 연봉의 2배 가까이 되는 상금을 품에 안았다.
비록 우승은 알론소에게 돌아갔지만 게레로 주니어는 팬들을 열광케 한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다.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메이저리그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 주자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야구 팬들은 과거 메이저리그 무대를 호령했던 '괴수'를 추억하며 즐거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