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가 지난해 3월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장정숙 의원실에 제출한 '2013~2017년 말까지 연도별, 유형별 학내 성범죄 발생현황'에 따르면 성범죄 사건 수는 △2013년 35건 △2014년 40건 △2015년 64건 △2016년 75건 △2017년 107건 등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인다. 가해자별로 살펴보면 △학생 106건 △교수(교원) 38건 △직원 16건 △강사 6건 △조교 1건 등으로 조사됐다. 5년간 총 320건의 사건 가운데 징계 된 수는 209건이다.
문제는 이 같은 통계가 '적발된' 건만 조사된 사실이라는 점이다. 은폐되거나 문제를 제기했어도 무마된 건까지 합친다면 실제 피해 건수는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총여학생회가 소임을 다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통계는 여전히 대학 내 성평등이 요원하고, 혐오와 차별에 만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주최로 지난 6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1층 국제회의장에서 '2019 성평등주간 기념 오픈 컨퍼런스'가 열렸다.
이날 '성평등한 대학 상상하기: 혐오와 차별을 넘어-우리는 멈추지 않는다!'를 주제로 여는 발표를 맡은 중앙대 이나영 교수(사회학과)는 "교수-학생 간 성폭력 문제뿐 아니라 학내 불법 촬영물이라든지 단톡방 성희롱 등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2018년 총여학생회 폐지 사건 등 학생들끼리 논란도 많이 있었다"라며 "아직은 대학 내에서 성평등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발언조차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현 상황을 두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혁명적인 시기'라고 표현했다.
이나영 교수는 대학 '안'을 들여다보면 '중층적 벽돌 구조'라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중층적 벽돌 구조란 서열화 된 학벌 구조, 학연과 연고주의, 남성 중심적 위계질서 등이 중층적으로 누적되어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가장 균질적인 남성 중심적 형태를 보이는 곳이 대학이다. 학연, 지연, 인맥 구조가 작동하며 촘촘한 '연줄 문화'가 작동하고 있다. 주로 '서울중심주의'로 대표되는 지역간 서열구조는 물론이고, 학교·학과 간 서열구조도 심각하다. 이러한 연줄 문화와 서열구조는 '카르텔'을 형성하고, 확장된다. 이 같은 한국 대학의 현실을 두고 한국사회의 누적적 적폐가 고인 일종의 '저수지'와 같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물적 자원과 연결돼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을 '봉건 가부장 확대가족 체제'라고 본다"라며 "기이한 생태 구조를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 위계 속 위계…기울어진 젠더 위계에 존재하는 대학 내 여성
학교, 학과 간 구조만큼 내부 인적 체계도 상당히 서열화되어 있다. 대학 내 모습만 살펴봐도 정-부-조교수, 강의전담 비정규직 교수, 시간강사, 그 외 각종 비정규직으로 이어지는 교수 직급 내 위계가 대학 내에 굳어지고 있다.
이 같은 대학 내 위계 속 젠더 위계 구조는 어떨까. '시사저널'이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실로부터 국내 대학(전문대 2년제·3년제 포함) 총 412개교(2018년 기준) 전체 교원 성비 자료를 단독으로 입수해 분석한 결과 정교수의 여성 비율은 17%인데 반대 남성은 무려 83%에 달했다. 반면에 열악한 노동 환경에 놓인 시간강사의 비율은 여성 52%, 남성 48%로 비슷하게 나타났다. 즉 다층적 위계 구조의 대학 내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에 존재하고 있음을 통계가 보여주는 것이다.
이나영 교수는 "이러한 필연적 결과는 다양성과 평등의 가치를 학습할 수 있는가? 못 한다"라며 "세대, 성별, 계층, 학연 카르텔이 공고화되고 불평등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통계청이 지난 1일 발표한 '2019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2018년 여학생의 대학진학률은 73.8%로 남학생(65.9%)보다 7.9%p 높다. 이처럼 대학 내 여학생의 수는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 교수의 수적 열세와 성평등에 대한 부족한 인식 속에서 성평등, 페미니즘에 대한 목소리는 내부 질서의 중심에 있는 남성들의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대학에 성평등(성폭력) 기구가 마련되어 있지만, 인권센터조차 남성 중심으로 구성된 가운데 실질적인 젠더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공간이 아닌 하나의 행정 단위로 존재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내부의 목소리가 크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서울 소재 대학 재학생 1006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5월 2일부터 6월 7일까지 현장 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30.3%가 '학내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성희롱·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라고 응답했다. 가벼운 신체 접촉(18.8%),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나 품평, 별명사용(18.6%), 가벼운 성적 농담(18.2%) 등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성적 불이익·장학금 지급 중단 등에 대한 우려, 실질적 처벌 권한 없는 인권센터·성평등센터의 한계, 피해자에 대한 교내 2차 가해 등 권력과 폐쇄적 조직 문화의 상호 작용 속에서 피해자는 위축된다.
성폭력, 성평등 문제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 성인지 감수성 등이 민감하게 작용해야 한다. 2차 피해에 대한 고려까지 필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견고한 권력 체제 및 위계적 조직구조와 남성 중심적 학문 구조에서 성차별이나 성폭력 문제가 해결되기 보다는 결국 피해자가 침묵하는 구조로 갈 수밖에 없다.
이나영 교수는 "이런 성폭력 사건을 누가 담당하는가. 한 번도 이런 사건 다뤄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며 "사람을 키우고 인권센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인권센터를 만들고 사람을 채운다면 성폭력 문제는 처리할 수 없다. 여성학 수업도 안 들어봤고 상담도 안 해봤고 법적 지식도 없는데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꼬집었다.
이나영 교수는 '백래시'는 역사적으론 늘 존재했고, 여성이 독립적이고, 여성의 목소리가 집합적 운동으로 성장할수록 거세져 왔다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백래시'에 저항하는 것 역시 필연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혐오와 차별을 용인하지 않고, 고질적인 연줄문화와 서열문화 스스로 깨나가야 한다"라며 "뿌리를 잃지 않되 적극적으로 횡단하고, 학교·학과·성별·나이·지역·차이를 인지하되, 기꺼이 넘어갈 것을 약속하며 손잡는 '연대'가 필요하다. 또한 여성단체 활동에 관심을 두고 응원하고 참여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은 미국 1960년대 후반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개인적 치유를 넘어 정치적 치유, 사회 전반의 혁명적 변화를 위해 일어나고 있다. '혁명'이라고 스스로 호명하길 바란다"라며 "투쟁의 지점에서 형성되는 연대감으로 버티고 성장하고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정의를 나가는 방향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견디기 바란다"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