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이날 한국 정부에 한-EU FTA(자유무역협정)의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13장)'에 따라 전문가 패널 소집을 공식 요청했다.
이는 FTA 상의 분쟁 해결 절차를 기존 '정부간 협의'에서 한 단계 격상한 것으로, 한국은 FTA 노동조항 위반 문제로 전문가 패널에 회부된 세계 최초의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또 전문가 패널의 권고 내용 여하에 따라서는 공식·비공식적인 무역 제재도 우려된다.
미중 무역갈등 등으로 대외여건이 악화된 데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악재가 겹친 한국이 이제는 ILO 핵심협약 비준에 속도를 내지 못한 탓에 또 다른 무역 리스크까지 떠안을 위기에 놓인 셈이다.
EU는 2011년 7월 한국과의 FTA가 발효된 이래 한국 정부가 노동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며 2가지 문제점을 지적해왔다.
우선 한국의 법과 관행이 ILO 회원국으로서 지켜야 할 4개 원칙(결사의 자유, 강제노동철폐, 아동노동철폐, 차별철폐)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로부터 거듭 지적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또 총 8개의 ILO 핵심협약 가운데 '결사의 자유(제87호·제98호)'와 '강제노동 금지(제29호·제105호)' 등 4개 핵심협약를 아직 비준하지 않은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이처럼 EU가 국내 노동권 수준을 문제로 한국과 국제 분쟁까지 빚는 이유는 보편적인 국제 규범으로 자리잡은 기본적인 노동권을 지키지 않은 국가와 FTA를 맺고 무역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EU로서는 정치적인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해 12월 EU는 한국 정부에 대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며 분쟁 해결 절차인 '정부간 협의' 절차를 요청했고, 양국은 그동안 정부간 공식 협의 등을 진행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①노사정 합의를 토대로 ②관련 법·제도를 개선한 뒤에 ③ILO 핵심 협약을 비준한다는 계획 아래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이를 다루기로 했다.
그러나 경사노위가 EU가 제시했던 협상의 마지노선인 지난 4월 초까지 합의에 실패했고, 정부는 국회에 비준안과 법 개정안을 동시 상정하기로 입장을 바꿨다.
그럼에도 EU는 정부간 협의 다음 단계인 '전문가 패널 소집 요청'으로 분쟁 절차의 강도를 한 단계 높인 것이다.
이처럼 EU가 대응 강도를 높인 까닭은 한 마디로 기본 노동권을 개선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EU는 한국 국회에서의 핵심협약 비준 통과 여부가 정치적으로 불확실하다고 봤다.
또 만약 협약을 비준하더라도 협약 비준을 계기로 노동권이 개선되기는커녕 자칫 관련 법 개정안의 내용이 ILO로부터 지적받았던 4개 원칙조차 어긴 수준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EU가 대응을 강화한 까닭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민주노총 류미경 국제국장은 "전문가 패널이 소집되면 핵심협약 비준 노력이 충분했는지뿐 아니라 결사의 자유 원칙에 어긋난다고 EU가 지적한 법조항이나 관행이 개선됐는지도 판단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노조법 2조 '근로자' 정의에서 배제된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노조활동에 대한 형법 조항을 적용해서 형사처벌하는 관행 등 6가지 사항이 지적된 바 있다"며 "정부가 법 개정 토대로 삼는 경사노위 공익위원안은 유럽연합의 요구에 한참 미달한다"고 비판했다.
이번 유럽연합의 요청에 따라 앞으로 2개월 안에 전문가 패널(3명)이 구성된다.
전문가 패널들은 90일간 당사국 정부, 관련 국제 기구, 시민 사회 자문단 등의 의견 등을 청취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 양측 정부에 제출한다.
보고서에서 제시하는 권고·조언 등의 이행 상황은 양측 정부의 담당국장을 수석 대표로 하는 정부 간 협의체인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점검한다.
이 경우 전문가 패널의 조사 자체만으로도 한국이 '노동권 후진국'으로 국제적인 낙인이 찍힐 뿐 아니라, 보고서 내용에 따라서는 EU의 다양한 보복 조치에 직면할 수 있다.
앞서 노동부 이재갑 장관은 지난달 ILO 100주년 총회 참석 당시 언론인터뷰에서 "한-EU FTA 노동의 장에 무역제재의 규정은 없다"면서도 "EU가 최근에 무역과 사회적 기준에 대한 연계를 굉장히 강화하고 있어 우려하는 바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해 ILO 핵심협약 비준 상황을 검토했던 EU 집행위원회 말스트롬 집행위원도 "전문가 패널을 소집해서 충고와 권고 사항을 제공받을 수 있고, 권고 사항은 각국에 구속력이 있게 된다"고 강조하고, "분쟁 해결 절차로 들어가면 해당 국가의 평판도 심한 손상을 입는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노동부는 "전문가 패널 소집 요청에 대응해 전문가 패널 선정 등의 관련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전문가 패널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의 입장을 상세히 설명하겠다"며 "ILO 핵심 협약 비준과 관련 법 개정 등을 위한 국내 절차를 차질 없이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