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신애 대표가 고민한 '제작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노컷 인터뷰] '기생충' 제작사 바른손E&A 곽신애 대표 ②

지난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바른손E&A 사무실에서 곽신애 대표를 만났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돌아보면 미리 계획해서 무얼 한 것은 별로 없었다. 지금이야 남편(정지우 감독), 오빠(곽경택 감독)와 연결 지어 '영화인 가족'으로 불리지만, 젊은 시절엔 꿈이 따로 있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해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었다.

영화에 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영화 전문 월간지 '키노'(KINO) 창간 멤버로 들어가게 되면서 "완전히 영화 쪽으로 인생이 흘러들어"갔다. 창간 준비에 2년, 실제로 잡지를 낸 2년까지 총 4년이 걸렸다. 그 4년은 인생의 중요한 출발점을 알리는 시간이 됐다.

'키노' 기자, 영화 홍보대행사 '바른생활' 공동대표, 영화 제작사 청년필름·LJ필름·신씨네 마케터, KNJ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 바른손 영화사업부 본부장, 바른손E&A 제작사 대표까지. 24년 동안 곽신애 대표가 걸어온 길이다.

국내에선 900만 관객 동원을 코앞에 뒀고, 해외에서는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시드니영화제 시드니 필름 프라이즈를 받은 영화 '기생충'. 그 '기생충'의 제작사 바른손E&A의 곽신애 대표를 지난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영화판에 발을 들이게 된 배경부터, 결혼하고 아이 낳은 여성으로 일해온 시간, 좋은 창작자를 발견하는 법, 영화에 꿈을 품은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은 말까지 알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영화와 엮이게 된 출발점, '키노'

곽신애 대표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은 뭔가 새로운, 다른 영화를 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던 시기다. 프랑스와 독일 등 해외 영화를 보면서 '영화가 예술일 수도 있다, 영화는 작가주의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새로운 영화'에 대한 욕구가 샘솟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해에만 영화 잡지가 속속 창간되기도 했다. 곽 대표는 "희한한 문화의 흐름이 있었다. 잡지 창간은 상징적인 거다. 그만큼 만드는 사람들이나 대중의 니즈가 있었다. 전 세계 어떤 나라에서 2~3만 명 보는 영화를 우리나라는 8만 명 보고, 작가영화 예술영화에 대한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올라갔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영화인을 꿈꾸는 좋은 인재가 굉장히 많았고"라고 말했다.

이때 움트기 시작한 기운이 만개한 시기를, 곽 대표는 2003년으로 기억했다. '쉬리', '친구' 등 이전부터 징조가 있다가 폭발한 때가 2003년인데, 그 저변이 만들어진 시기를 돌아보면 1995년이라는 것이다. '키노'가 창간된 해다.

'키노'로 알 수 있듯 영화를 하나의 예술로 접근하려는 해석과 비평의 시도가 있었다면, 다른 한쪽엔 영화로 자기 세계를 펼쳐 보이겠다며 열정을 불태운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봉준호-장준환 감독, 독협 워크샵 출신 류승완 감독 등이 대표적이다. 곽 대표의 남편인 정지우 감독 역시 비슷한 시기에 영화제작소 청년이라는 영화 동아리에 몸담으며 단편 작업을 해나갔다.

곽신애 대표 책상에 올려져있던 영화 전문 월간지 '키노'의 마지막 호 99호. 곽 대표는 '키노'의 100호는 '키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있다며 여전한 애정을 드러냈다. (사진=김수정 기자)
곽 대표는 "정말 강하고 깊게 '영화는 예술이야'라고 하는 '키노'라는 잡지에 열광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 입장에서 그들은 우리나라 영화를 책임질 새싹들이었고. 우리가 보면서 자랐던 영화들과는 한 차원 다른, 훨씬 더 매력적인 걸 만들 거라고 믿었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 서로 아는 거다. 말하진 않았지만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영화를 할 것이라는 동지의식 같은 게 있었다"고 부연했다.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재정적 지원도 뒷받침됐다. 삼성은 단편영화 활성화를 목적으로 '삼성나이세스 서울단편영화제'를 열었고 큰 상금을 걸었다. 곽 대표는 "단편영화 한 편에 300~500만 원 들던 시절에 더 큰 상금을 줬다"며 "임순례 감독의 '우중산책'이 그 영화제 1회 대상이었다. (출품된 영화를 보면) 진짜로 훌륭했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인을) 육성하는 기관도 많아졌고, 상 주고 지지하는 분위기도 있고, 그들을 다루는 매체도 있어서 되게 융성하던 시절이다. 단순히 '돈 버는 영화를 찍을 거야'가 아니라 대중성과 예술성을 같이 가져가자는 데 공감대가 있었다"고 전했다.

"지금 그 시대 출신들이 활동 많이 하고 있고요.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한 어떤, 친근하고 든든하고 애틋한 감정들이 있어요. 그들이 처져가는 것 같을 땐 맘이 아프고, 다시 힘내고 좋은 작품 만들어갈 땐 좋아요.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해도 (서로) '키노 출신이니까'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근데 (잡지는) 단명했죠. (웃음) 성인으로 살아오며 몸으로 느낀 건, 퀄리티는 늘 효율에 지더라고요. 세상 흐름의 방식이 더 편하고 더 대량생산 방식으로 가요. 퀄리티를 가다듬는 방식이 아니라요. 그 대신 저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사람들이 ('키노'에게서) 수혜자라고는 생각하죠. 잡지는 망했지만 (웃음) 읽은 사람이나 만든 사람이나 득을 많이 봤어요."

◇ 제작자가 되다, 저절로?

기자 훈련받은 게 1년, 창간 준비한 게 1년, 기자로 일한 게 2년, 4년을 '키노'에 바쳤다. 이렇게 영화계에 발을 들인 곽 대표에게 제작자가 된 계기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냥 저절로…"라며 웃음 띤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개연성은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홍보대행사와 투자사가 마케팅을 담당하는 현재와 달리 과거에는 제작사 안에 기획·마케팅 업무를 같이하는 기획실이 있었다. 곽 대표는 여러 제작사를 돌며 어떤 영화를 만들지, 어떤 영화 판권을 살 건지 등 '현재도 하는 일'을 접했다.

곽 대표는 "지금 제가 하는 일을 거의 한 셈이다. 최종 책임자가 아닐 뿐이다. (영화) 디벨롭에 관여하고, 캐스팅할 때 의견 내고, 필요하면 섭외도 하고, 투자사 미팅도 하고, 개봉 때 마케팅 홍보 자료도 쓰고. 변신, 또 변신 이건 아니고 점점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로 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작자가 된 구체적인 계기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그는 일반적인 '직장생활' 형태로 일하는 게 너무 필요했다. 아이가 있으니 생활 리듬의 안정성이 시급했다. 월급 주는 영화사에서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다. 2010년 바른손에 입사한 취지도 똑같았다.

곽 대표는 "제가 모시던 두 분의 프로듀서가 한분 한분 독립해서 나가는 거다. 그럼 누가 제작을 하나? '너밖에 없다'고 해서 '엇, 제가 제작자를요?' 이러다가 하게 된 것"이라며 "이제 아들이 커서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아도 되긴 한다. 제 개인적인 삶의 조건과 영화라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다 보니까 이런 필모(그래피)가 생기더라"라고 전했다.

곽신애 대표는 '가려진 시간'과 '기생충'의 메인 프로듀서를 맡았다. (사진=㈜바른손E&A 제공)
"제가 제일 큰 규모로 제 팀을 꾸리고 있을 때 13~14명이 있었어요. 3개 팀으로 나눠서 A 작품은 몇 명, B 작품은 몇 명 이렇게요. (그때 후배 중) 영화계를 떠난 친구도 있고 지금도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전에 술 마시다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제가 이사였을 땐데 '이사님이 결혼하고 아이도 있는 여자로서 이 영화계에서 어디까지 생존할 수 있는지가 샘플이 될 것 같다'고요. 그러면서 '오래 버티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순간에 되게 지치는 기분이 들고, 힘들고 화도 났어요, 살면서. 어쨌든 일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만 이 일의 특성이 올인해야 하는 건데, 가만히 둘러보면 저 같은 사람이 없었어요. (여성 영화인은) 싱글이거나, 같이 살다시피 하면서 애를 봐주는 부모님이 있거나, 결혼했어도 아이가 없었어요. 단 한 명도 나 같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아서, 혼자 제 상황에 대해 화가 나고 답답했던 순간이 있었죠.

우리('기생충') 촬영할 때도 서울에서 할 때는 애가 학교 일찍 가니까 데려다주고도 제가 현장에 매일 갈 수 있는 거예요. 고3이면 애를 한 발이라도 덜 걷게 하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잖아요. 서울은 어느 현장이든 커버가 돼서 오전 9시 반~10시엔 도착할 수 있었어요. 지방 촬영 시작할 때부턴 남편하고 일정을 맞췄죠. 휴차 있는 날과 휴차 아닌 날을 놓고 계산해서 금요일에 애를 데려다주고, 남편이 된다고 하면 월요일까지 지방에 있고. 아니면 하루 일찍 가고. 어떤 땐 전주-서울을 당일치기로 다니기도 했어요.

그게 몸에 붙은 거예요. 원래 서로 싸울 일 없어도 애 문제로 (부부가) 서운해하고 그러잖아요. 안 그러기 위해서 서로 몸에 장착한 게 있는 거예요. 육아 초반 시절 거치면서 몸이 그렇게 움직이는 거죠. 제가 왔다 갔다 하는 걸 현장에서도 알잖아요. 그럼 감독님이 고생이 많다고 다독여주었어요. 송(강호) 선배님도 안 힘드시냐고 하는데, 그게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 다 알고 하는 얘기 같아서 뭉클했어요."

◇ 이 작품은 해 보고 싶다, 느낌이 오는 순간

곽 대표는 '가려진 시간'(2016)과 '기생충'(2019), 총 2편에서 메인 프로듀서를 맡았다. 어떤 걸 봤을 때 영화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지 묻자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내가 보면 되게 좋아할 것 같은 영화"라고 답했다.

좋은 창작자를 발견하기 위해 그는 영화를 "엄청 본다." 아카데미 졸업영화는 기본이고, 단편영화제도 가고 개봉한 영화도 많이 본다. 주로 신인 감독들을 많이 본다. 중견 감독들은 이미 파트너 제작사를 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견 감독들에겐 원작이나 아이템이 있을 때 제안하는 편이다.

곽 대표는 "제가 반하는, 매력을 느끼는 감독이 어디 숨어 있나, 언제 튀어나오나 하고 찾아보기도 한다. 사람들한테도 많이 묻는다. 추천받고 나서는 제가 제 감성으로 보고 나서 좋으면 만나서 얘기도 해 보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런 영화를 해 보고 싶다'고 정한다. ('가려진 시간'의) 엄태화 감독도 그렇게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제작자가 늘 원하는 영화를 만드는 건 이상에 가까울지 모른다. 영화는 잘될지 안될지 예측하기 힘든 '흥행업'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과, 적어도 손해를 보진 않아야 한다는 현실적 압박 사이에서 어떻게 답을 찾고 있을지 궁금했다.

곽 대표는 "결과적으로 돈을 못 버는 경우가 있다"면서도 "'외부에 돌려도 된다, 캐스팅·투자 진행해도 된다, 이거 갖고 움직여 보죠' 하는 버전은 흥행도 될 거라고 생각한 버전이다. 되게 꼼꼼히 검토한다"고 말했다.

이어, "흥행은 시기 등 여러 가지 조건이 있지만 제작자로서 손익을 넘길 수 있다는 마인드로 간다. 감독이 직업으로 안정적인 벌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시장과 대중에게도 평가를 받아서 수입도 올리고 떳떳한 직업으로서 유지되려면, 흥행해야 한다. 그 기준은 되게 선명하게 있다. 이건 날 위한 게 아니라 감독님을 위한 거니까 정당성이 있다"라고 부연했다.

'키노' 99호에는 곽신애 대표의 글과 봉준호 감독의 글이 동시에 실렸다. (사진=김수정 기자)
곽 대표는 "독립영화를 주로 찍는 감독님이어도 '저하고는 상업영화만 하자'고 얘기한다. 여기가 제가 오너인 회사는 아니지 않나. 고용된 사람이고, 저는 회사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 너무 만들고 싶어도 돈 못 벌 게 뻔하다면 '만들고 싶은 영역'에 안 집어넣게 되더라. 오래 일하다 보니 여기(회사) 식으로 생각하는 법도 알게 됐다. 아무튼 적어도 시작할 때는 많은 검토 끝에 '이 영화는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간다"고 밝혔다.

"삶과 영화가 분리되지 않는 한덩어리 같다"고 밝힌 곽 대표에게, 영화인의 꿈을 품은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아주 구체적인 답이 돌아왔다.

"보통은 다 감독이 되고 싶어 해요. 내가 감독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봐야죠. 감독은 정말 재능이 없고 안 맞으면 답이 없거든요. 영원히 준비만 하다가 못 찍을 수도 있어요. 영화 파트 안에서 내 기질, 성향과 가장 잘 맞는 걸 조사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해볼 만하다 싶으면 시작해 보는 거? 감독을 하려면 커뮤니케이션 능력, 특별한 창의력, 끔찍한 인내력이 필요하다. 강철 같은 인내심, 지구력. 자기 기질에 가장 잘 맞고 잘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영화 파트를 고민해 봤으면 좋겠어요."

그럼 제작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곽 대표는 이와 관련해 생각을 정리해 본 적이 없다며 잠시 답을 고민했다. 그는 "손익 계산 하는 마인드도 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작품 보는 눈이지 않을까. 이야기 안에서 의미와 재미를 느끼는 보편적인 안목"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영화 하겠다고 하면서 본 (영화) 편수도 적으면 안 된다. 창작자를 할 거면 고민도 생각도 많이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또, 프로듀서나 제작자는 절대로 조명받는 직업이 아니다. 뒷바라지하는 파트다. 내가 퍼포먼스 했을 때 관심 가져주길 바란다면 제작자보단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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