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영화 전문 월간지 '키노'(KINO) 창간 멤버로 들어가게 되면서 "완전히 영화 쪽으로 인생이 흘러들어"갔다. 창간 준비에 2년, 실제로 잡지를 낸 2년까지 총 4년이 걸렸다. 그 4년은 인생의 중요한 출발점을 알리는 시간이 됐다.
'키노' 기자, 영화 홍보대행사 '바른생활' 공동대표, 영화 제작사 청년필름·LJ필름·신씨네 마케터, KNJ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 바른손 영화사업부 본부장, 바른손E&A 제작사 대표까지. 24년 동안 곽신애 대표가 걸어온 길이다.
국내에선 900만 관객 동원을 코앞에 뒀고, 해외에서는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시드니영화제 시드니 필름 프라이즈를 받은 영화 '기생충'. 그 '기생충'의 제작사 바른손E&A의 곽신애 대표를 지난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영화판에 발을 들이게 된 배경부터, 결혼하고 아이 낳은 여성으로 일해온 시간, 좋은 창작자를 발견하는 법, 영화에 꿈을 품은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은 말까지 알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영화와 엮이게 된 출발점, '키노'
곽신애 대표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은 뭔가 새로운, 다른 영화를 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던 시기다. 프랑스와 독일 등 해외 영화를 보면서 '영화가 예술일 수도 있다, 영화는 작가주의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새로운 영화'에 대한 욕구가 샘솟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해에만 영화 잡지가 속속 창간되기도 했다. 곽 대표는 "희한한 문화의 흐름이 있었다. 잡지 창간은 상징적인 거다. 그만큼 만드는 사람들이나 대중의 니즈가 있었다. 전 세계 어떤 나라에서 2~3만 명 보는 영화를 우리나라는 8만 명 보고, 작가영화 예술영화에 대한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올라갔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영화인을 꿈꾸는 좋은 인재가 굉장히 많았고"라고 말했다.
이때 움트기 시작한 기운이 만개한 시기를, 곽 대표는 2003년으로 기억했다. '쉬리', '친구' 등 이전부터 징조가 있다가 폭발한 때가 2003년인데, 그 저변이 만들어진 시기를 돌아보면 1995년이라는 것이다. '키노'가 창간된 해다.
'키노'로 알 수 있듯 영화를 하나의 예술로 접근하려는 해석과 비평의 시도가 있었다면, 다른 한쪽엔 영화로 자기 세계를 펼쳐 보이겠다며 열정을 불태운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봉준호-장준환 감독, 독협 워크샵 출신 류승완 감독 등이 대표적이다. 곽 대표의 남편인 정지우 감독 역시 비슷한 시기에 영화제작소 청년이라는 영화 동아리에 몸담으며 단편 작업을 해나갔다.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재정적 지원도 뒷받침됐다. 삼성은 단편영화 활성화를 목적으로 '삼성나이세스 서울단편영화제'를 열었고 큰 상금을 걸었다. 곽 대표는 "단편영화 한 편에 300~500만 원 들던 시절에 더 큰 상금을 줬다"며 "임순례 감독의 '우중산책'이 그 영화제 1회 대상이었다. (출품된 영화를 보면) 진짜로 훌륭했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인을) 육성하는 기관도 많아졌고, 상 주고 지지하는 분위기도 있고, 그들을 다루는 매체도 있어서 되게 융성하던 시절이다. 단순히 '돈 버는 영화를 찍을 거야'가 아니라 대중성과 예술성을 같이 가져가자는 데 공감대가 있었다"고 전했다.
"지금 그 시대 출신들이 활동 많이 하고 있고요.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한 어떤, 친근하고 든든하고 애틋한 감정들이 있어요. 그들이 처져가는 것 같을 땐 맘이 아프고, 다시 힘내고 좋은 작품 만들어갈 땐 좋아요.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해도 (서로) '키노 출신이니까'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근데 (잡지는) 단명했죠. (웃음) 성인으로 살아오며 몸으로 느낀 건, 퀄리티는 늘 효율에 지더라고요. 세상 흐름의 방식이 더 편하고 더 대량생산 방식으로 가요. 퀄리티를 가다듬는 방식이 아니라요. 그 대신 저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사람들이 ('키노'에게서) 수혜자라고는 생각하죠. 잡지는 망했지만 (웃음) 읽은 사람이나 만든 사람이나 득을 많이 봤어요."
◇ 제작자가 되다, 저절로?
기자 훈련받은 게 1년, 창간 준비한 게 1년, 기자로 일한 게 2년, 4년을 '키노'에 바쳤다. 이렇게 영화계에 발을 들인 곽 대표에게 제작자가 된 계기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냥 저절로…"라며 웃음 띤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개연성은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홍보대행사와 투자사가 마케팅을 담당하는 현재와 달리 과거에는 제작사 안에 기획·마케팅 업무를 같이하는 기획실이 있었다. 곽 대표는 여러 제작사를 돌며 어떤 영화를 만들지, 어떤 영화 판권을 살 건지 등 '현재도 하는 일'을 접했다.
곽 대표는 "지금 제가 하는 일을 거의 한 셈이다. 최종 책임자가 아닐 뿐이다. (영화) 디벨롭에 관여하고, 캐스팅할 때 의견 내고, 필요하면 섭외도 하고, 투자사 미팅도 하고, 개봉 때 마케팅 홍보 자료도 쓰고. 변신, 또 변신 이건 아니고 점점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로 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작자가 된 구체적인 계기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그는 일반적인 '직장생활' 형태로 일하는 게 너무 필요했다. 아이가 있으니 생활 리듬의 안정성이 시급했다. 월급 주는 영화사에서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다. 2010년 바른손에 입사한 취지도 똑같았다.
곽 대표는 "제가 모시던 두 분의 프로듀서가 한분 한분 독립해서 나가는 거다. 그럼 누가 제작을 하나? '너밖에 없다'고 해서 '엇, 제가 제작자를요?' 이러다가 하게 된 것"이라며 "이제 아들이 커서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아도 되긴 한다. 제 개인적인 삶의 조건과 영화라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다 보니까 이런 필모(그래피)가 생기더라"라고 전했다.
어떤 순간에 되게 지치는 기분이 들고, 힘들고 화도 났어요, 살면서. 어쨌든 일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만 이 일의 특성이 올인해야 하는 건데, 가만히 둘러보면 저 같은 사람이 없었어요. (여성 영화인은) 싱글이거나, 같이 살다시피 하면서 애를 봐주는 부모님이 있거나, 결혼했어도 아이가 없었어요. 단 한 명도 나 같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아서, 혼자 제 상황에 대해 화가 나고 답답했던 순간이 있었죠.
우리('기생충') 촬영할 때도 서울에서 할 때는 애가 학교 일찍 가니까 데려다주고도 제가 현장에 매일 갈 수 있는 거예요. 고3이면 애를 한 발이라도 덜 걷게 하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잖아요. 서울은 어느 현장이든 커버가 돼서 오전 9시 반~10시엔 도착할 수 있었어요. 지방 촬영 시작할 때부턴 남편하고 일정을 맞췄죠. 휴차 있는 날과 휴차 아닌 날을 놓고 계산해서 금요일에 애를 데려다주고, 남편이 된다고 하면 월요일까지 지방에 있고. 아니면 하루 일찍 가고. 어떤 땐 전주-서울을 당일치기로 다니기도 했어요.
그게 몸에 붙은 거예요. 원래 서로 싸울 일 없어도 애 문제로 (부부가) 서운해하고 그러잖아요. 안 그러기 위해서 서로 몸에 장착한 게 있는 거예요. 육아 초반 시절 거치면서 몸이 그렇게 움직이는 거죠. 제가 왔다 갔다 하는 걸 현장에서도 알잖아요. 그럼 감독님이 고생이 많다고 다독여주었어요. 송(강호) 선배님도 안 힘드시냐고 하는데, 그게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 다 알고 하는 얘기 같아서 뭉클했어요."
◇ 이 작품은 해 보고 싶다, 느낌이 오는 순간
곽 대표는 '가려진 시간'(2016)과 '기생충'(2019), 총 2편에서 메인 프로듀서를 맡았다. 어떤 걸 봤을 때 영화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지 묻자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내가 보면 되게 좋아할 것 같은 영화"라고 답했다.
좋은 창작자를 발견하기 위해 그는 영화를 "엄청 본다." 아카데미 졸업영화는 기본이고, 단편영화제도 가고 개봉한 영화도 많이 본다. 주로 신인 감독들을 많이 본다. 중견 감독들은 이미 파트너 제작사를 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견 감독들에겐 원작이나 아이템이 있을 때 제안하는 편이다.
곽 대표는 "제가 반하는, 매력을 느끼는 감독이 어디 숨어 있나, 언제 튀어나오나 하고 찾아보기도 한다. 사람들한테도 많이 묻는다. 추천받고 나서는 제가 제 감성으로 보고 나서 좋으면 만나서 얘기도 해 보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런 영화를 해 보고 싶다'고 정한다. ('가려진 시간'의) 엄태화 감독도 그렇게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제작자가 늘 원하는 영화를 만드는 건 이상에 가까울지 모른다. 영화는 잘될지 안될지 예측하기 힘든 '흥행업'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과, 적어도 손해를 보진 않아야 한다는 현실적 압박 사이에서 어떻게 답을 찾고 있을지 궁금했다.
곽 대표는 "결과적으로 돈을 못 버는 경우가 있다"면서도 "'외부에 돌려도 된다, 캐스팅·투자 진행해도 된다, 이거 갖고 움직여 보죠' 하는 버전은 흥행도 될 거라고 생각한 버전이다. 되게 꼼꼼히 검토한다"고 말했다.
이어, "흥행은 시기 등 여러 가지 조건이 있지만 제작자로서 손익을 넘길 수 있다는 마인드로 간다. 감독이 직업으로 안정적인 벌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시장과 대중에게도 평가를 받아서 수입도 올리고 떳떳한 직업으로서 유지되려면, 흥행해야 한다. 그 기준은 되게 선명하게 있다. 이건 날 위한 게 아니라 감독님을 위한 거니까 정당성이 있다"라고 부연했다.
"삶과 영화가 분리되지 않는 한덩어리 같다"고 밝힌 곽 대표에게, 영화인의 꿈을 품은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아주 구체적인 답이 돌아왔다.
"보통은 다 감독이 되고 싶어 해요. 내가 감독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봐야죠. 감독은 정말 재능이 없고 안 맞으면 답이 없거든요. 영원히 준비만 하다가 못 찍을 수도 있어요. 영화 파트 안에서 내 기질, 성향과 가장 잘 맞는 걸 조사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해볼 만하다 싶으면 시작해 보는 거? 감독을 하려면 커뮤니케이션 능력, 특별한 창의력, 끔찍한 인내력이 필요하다. 강철 같은 인내심, 지구력. 자기 기질에 가장 잘 맞고 잘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영화 파트를 고민해 봤으면 좋겠어요."
그럼 제작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곽 대표는 이와 관련해 생각을 정리해 본 적이 없다며 잠시 답을 고민했다. 그는 "손익 계산 하는 마인드도 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작품 보는 눈이지 않을까. 이야기 안에서 의미와 재미를 느끼는 보편적인 안목"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영화 하겠다고 하면서 본 (영화) 편수도 적으면 안 된다. 창작자를 할 거면 고민도 생각도 많이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또, 프로듀서나 제작자는 절대로 조명받는 직업이 아니다. 뒷바라지하는 파트다. 내가 퍼포먼스 했을 때 관심 가져주길 바란다면 제작자보단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