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늙어서 배우면 어따 쓰겠냐고 하는데 나는 모르고 살기가 서러웠습니다"라고 박무순 할머니는 말한다. 그래서 함양 할매들은 일주일에 한 번 한글 공부하러 학교에 간다. '가시나들'이라고 못 배우고, 전쟁과 가난을 겪느라 못 배우고, 남편과 자식들을 돌보느라 못 배운 세월을 나이가 들어서야 보상받게 됐다. MBC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 '가시나들'(연출 권성민)은 그런 할머니들의 삶을 담담하게 들여다본다.
'가시나들'은 일종의 관찰 예능이다. 다섯 할매들의 일상을 면밀히, 그러나 아무런 개입 없이 들여다본다. 카메라를 따라, 할머니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 우리는 그들의 삶 속에 조금씩 빠져들어 간다. 그렇게 조금씩 빠져들어 가다 보면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느새 우리는 그들의 과거와 우리의 현재, 그들의 현재와 우리의 미래를 이어가게 된다.
할머니들의 일상과 삶을 고스란히 시청자에게 전하기 위해 제작진은 다른 여타의 예능보다 몇 발자국 뒤에 위치했다. 온전히 전해진 함양 할매들의 삶에 오롯이 공감하고 웃을 수 있었다. 어느덧 8년 차가 된 권성민 PD와 17년 차 예능 작가인 김수지 작가, 8년째 예능 촬영장을 담아내고 있는 박정민 카메라 감독을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리고 '가시나들'이 어떻게 시청자에게 다가가고자 했는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 할머니들의 일상을 그냥 쭉 따라가야 하는데, 찍으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
박정민 카메라 감독(이하 박정민) 솔직히 말하면 다른 예능보다 조금 덜 힘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예능에 비해서 개입을 최대한 안 하는 것도 맞다고 생각했다. 할머님들이 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지켜보는 입장인데도 재밌었다. 그런데 카메라로 촬영하는 입장에서는 할머님이나 연예인 짝꿍들이 행동을 하면 포인트를 짚어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이건 안 찍어도 되나 싶긴 했다.
김수지 메인작가(이하 김수지) 할머니들을 최대한 사전에 많이 만나 뵙고,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행동을 하겠구나 막연하게 생각하고 촬영에 임했는데 돌발 상황이 많았다. 여기로 가시겠거니 생각했는데 정 반대 방향으로 가신다거나, 이렇게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저렇게 하신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의외로 그런 돌발적이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주는 재미 포인트라든지 힐링 포인트가 많아서 오히려 좋았다. 예를 들면 감독님은 인서트(화면의 동작이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한 화면) 촬영을 해야 하는데 할머님들이 식사하러 안 가겠다고 스태프들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또 우리는 할머니들이 오후에는 밭에 가서 무언가를 하시는 건데 갑자기 진달래를 따러 가자며 가실 때도 있었다.
박정민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겼다. 이브가 남순 할머니한테 진달래 다 땄다고 내려가자고 하는데도 남순 할머니는 듣지도 않고 이쪽저쪽 다니시며 계속 진달래를 따셨다. 돌발이면 돌발인 데 재밌었다. 할머니가 진짜 본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니까.
권성민 PD(이하 권성민) 대본이라는 게 따로 없긴 해도 사전에 할머니들을 취재하면서 할머니가 오후에 뭘 하시는지 조사하고 이런 걸 같이 하면 재밌겠다고 스태프들이 꼽는다. 일상에 하던 것 중 같이 해보자고 사전에 말씀드려서 우리는 당연히 갈 거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진달래를 따러 가자고 하시는 거다.
김수지 나름 구성도 하고 대본도 열심히 준비하고 하는데 현장에서 바뀌는 게 많았다. 할머님들은 이게 방송이라고 생각을 안 하신다고 해야 하나, 우리와는 방송에 대한 생각이 다르시니까, 갑자기 진달래 따러 가고 싶으시면 가시고, 음식을 해먹고 싶으면 해 드신다.
권성민 연출에 욕심을 낸다면 할머님들이 돌발 상황을 해도 설득해서 다른 걸 하자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는 안 했고, 그런 예상치 못한 상황이 프로그램의 매력으로 살아났다. 카메라 감독님은 할머니들의 동선을 모르고 예측도 안 되니까 고생을 많이 하셨다. 프레임 바깥으로 나갈 때가 많아서 감독님들이 정말 열심히 따라다녔다. 그리고 우리 프로그램을 보면 앵글들이 보통 영화에서 보통 쓰는 것처럼 먼 거리에서 앵글을 고정하고 큰 그림에서 정적인 컷을 담은 게 많다. 예능에서 잘 안 쓰던, 크고 무거운 카메라라 카메라 감독님들이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
박정민 아무래도 찍던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거긴 했지만, 걱정은 많이 안 했다. 그런데 조금 더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못 참고 (현장 안으로) 들어가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습관적으로 출연자가 뒤를 돌면 그 얼굴을 찍기 위해 카메라도 같이 돌아야 한다. 그런데 '가시나들'에서는 이렇게 하면 안 되고 버텨야 한다. 카메라를 움직이면 소음이 나고, 소음으로 인해 할머니들이 방해를 받을 수 있는 게 있다. 그런 점에서 참아야 한다는 것에 관해 걱정을 많이 했다. 아무래도 기존 예능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첫날에는 혼돈에 빠졌는데, 첫날 이후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권성민 촬영 끝나고 카메라 감독님들로부터 엄청 원성이 자자했다.
박정민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이렇게 해야 했는데, '가시나들'에서는 하지 말라고 제약하니까. 촬영하면서도 이걸로 편집이 될까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 촬영하면서 아쉬운 점은 없었나.
박정민 아쉬웠던 건 첫날이다. 혼란기에서 적응하고 난 후에는 그때는 이건 이렇게 가면 안 됐을 텐데 하는 게 있더라.
권성민 보통 예능에서 카메라의 기본 원칙 중 상황을 상세하게 담는 게 제1원칙이다. 아주 디테일한 동작과 말에서 재미가 오기 때문에 그런 걸 다 담아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프로그램을 보면 뒤로 갈수록 예쁜 그림이 많다. 감독님들도 이건 이렇게 가야겠다고 판단한 거 같다.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그림이 예뻐지더라.
박정민 그리고 아쉬웠던 건 내가 있었던 부분은 아니지만, 할머니들이 시를 낭송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 샷으로 시를 낭독하는 게 집중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김수지 이남순 할머니가 글을 못 읽으시니까 시 낭송하는 부분을 촬영할 때 앞에서 작가가 읽으면 할머니가 따라 읽으셨다.
박정민 나간 상태로 보면 그 부분이 아쉽다.
권성민 감독님들은 쭉 한 컷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세팅을 했었다. 그런데 이남순 할머니가 시를 읽으실 때 종이를 들고 읽어드렸는데, 작가가 종이를 위로 드니까 손을 들라는 의미인 줄 알고 같이 손을 들면서 행동까지 따라 하셨다.
김수지 그렇게 우리 행동을 따라 하시는 할머니가, 이렇게 말해도 되나, 귀여웠다.
▶ 자극적인 자막과 설정이 없는 '청정 예능'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예능치고는 '진솔하다', '너무 진솔하다'라는 평가도 있더라.
김수지 그건 약간 고정관념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나도 예능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TV 예능이 조금 더 다양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 평가에 대해서는 일부 동의도 한다. 일요일 프라임 시간대에 핫한 예능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른바 'MSG'가 더 들어가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시청률이 안 나온 부분 있겠지만, 그래도 '가시나들'은 다른 예능 프로그램과 조금은 다른 포인트가 있고, 그래서 마니아층이 생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MSG가 들어가서 이른바 '빅 재미'를 뽑아냈다면, 빤한 예능이 되지 않았을까. 같은 아이템이라도, 다른 데서 했던 것보다는 안 했던 걸 하고, 같은 아이템 하더라도 달리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권성민 예능에서 소위 말하는 MSG란 최대한 훨씬 더 친절해지는 거다. 사실은 오디오로 듣고 비디오로 봐도 알 수 있는 정보를 자막으로 한 번 더 적어준다든지, 재밌는 장면이 있으면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면서 얼마나 재밌는 장면인지 강조해주는 게 예능에서 말하는 '친절함'이자 '웃음 포인트'다. '가시나들'의 경우는 화면과 오디오로 알 수 있는 정보는 자막으로 쓰지 않았다. 굉장히 웃긴 장면이어도 다른 각도로 봐야 할 필요가 없으면 안 했다.
▶ '가시나들'을 통해 시청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점은 무엇이었나.
권성민 노년층도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처럼 똑같이 오늘 하루를 온전히 느끼고 살아가는 '현재진행형'인 사람들이라는 게 보였으면 했다. 도시에서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날 때 우리랑 너무 다른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우리의 가치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볼 때도 많다. 어떤 사람, 어떤 대상이든 간에 대화하고 같이 보고 그들의 세세한 면을 볼 기회가 없다면 우리랑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 세대만 해도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고 취직한 후부터는 부모님이 또다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분이라는 걸 잊는 거 같다. 인생의 과업을 다 끝내고 나면 노년의 생은 덤이나 여분의 삶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말이다. 자식들을 다 독립시키고 남편과 사별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인생의 어떤 과업은 다 끝났어도, 이들에게는 또 하루가 있고, 한글 배우면서 새롭게 시작하는 설렘이 있고, 매일 만나는 친구가 있고, 새롭게 만나는 인간관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오늘의 할 일이 있고, 싫어하는 음식도 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도 나이가 들어갈 텐데, 노년층을 다른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조금만이라도 세밀하게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김수지 비슷하다. 일단 시청자들이 많이 공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덜 예능스럽더라도 조금 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의 프로그램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나의 할머니도 일제 시대에 태어나서 한글 공부를 뒤늦게 하셨는데, 글씨가 정말 예쁘다. 할머니께서 내가 어릴 때부터 써준 편지들이 있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세뱃돈 줄 때도 꼭 위에 한 말씀씩 써주시는데, 항상 똑같다. '건강해라.' 남순 할머니가 이브한테도 '건강해라'라고 한다. 그 말 한마디도 우리가 한 번은 들어봤던 말이다. 그런 것들이 사소하지만,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인 거 같다. 프로그램을 보고 시청자들이 할머니에게 전화 한 번 더 하고 엄마한테 살가운 문자라도 한 번 더 하는 프로그램이 되었길 바란다.
박정민 다른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봐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찍는 순간에도 그랬다. 모든 게 기존 있던 것과 달랐다. 할머님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쓰는 스마트폰도 쓸 줄 모르지만, 그들의 삶 안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고 계신다. 모든 게 정감이 있었다. 그런 게 비쳤으면 한다.
권성민 감독님들이 촬영 끝나고 갈 때 보통 자면서 올라오는데 다들 자기가 담당한 할머니가 더 귀엽다고 자랑하시더라.(웃음)
김수지 우리 할머니가 더 귀엽다, 아니다, 우리 할머니는 더 귀엽다.(웃음)
박정민 남순 할머니가 최고였다.(일동 웃음)
김수지 존재 자체가 '넘사벽'(매우 뛰어나서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거나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긴 하다.(웃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