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하게 올린 머리, 고급스러운 원단의 옷, 도회적이면서도 깐깐해 보이는 이미지를 완성하는 안경, 예의를 갖추지만 저자세는 아닌 말투. 해맑고 엉뚱한 사모님 연교(조여정 분)의 신임을 얻어, 어마어마한 부잣집 살림을 도맡는 문광(이정은 분)은 겉모습만 보면 입주 가사도우미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집안 분위기에 완벽히 동화돼 있다.
어느덧 800만 관객을 넘긴 '기생충'(감독 봉준호)이 공개된 후, 가장 많이 화제에 오른 인물은 이정은이었다. 단순히 독특함만 지닌 캐릭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엄청난 연기력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을 주목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정은은 문광 역이 지닌 '반전' 때문에 일정 기간 침묵을 지켜야 했다. '기생충'이 개봉한 지 3주차에 접어들고 나서야 인터뷰를 통해 캐릭터와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대세 배우 이정은을 만났다.
◇ '마더', '옥자'… '기생충' 전부터 시작된 봉준호 감독과의 인연
이정은은 10년 전 개봉한 영화 '마더'에서 장례식장에 있는 아정의 친척 역을 맡는 것으로, 봉준호 감독 작품에 발을 들였다. 비중이 크지 않은, 어찌 보면 '단역'에 가까운 역할이었지만 3차까지 오디션을 보고 감독 미팅을 했다.
연극 '빨래' 제작사 대표이자 '마더', '해무', '옥자', '기생충까지 10여 년을 봉 감독과 함께하며 핵심 스태프로 일하고 있는 최세연 의상감독의 권유로 도전한 오디션이었다.
이정은은 "아주 작은 역인데도 어마어마하게 신경을 쓰시는 것 같았다"며 "그런데 제가 중요한 역할인 것처럼 호명해 주시니까 내가 (극의) 장치가 아니라 온전한 인격체로서, 굉장히 중요한 파트를 맡는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작품을 같이한 이후, 봉 감독은 배우들과 함께 이정은이 무대에 서는 '빨래'를 보러 왔다. 이정은은 "객석에서 벌떡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쳐 주셨고, 그걸 보고 다른 사람들도 박수를 쳤다. 원래 뮤지컬 좋아하지 않는 편이신데도 와 줬다"고 말했다.
이어, "(작품을 하면서) 노래하고 연기하는 음성을 같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걸 좋게 보신 것 같다. 그래서 소리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신 것 같다. 제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는 아닌데, 캐릭터 만들 때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고 하시더라. 저는 몰랐는데. 그때부터 목소리 좋다고 하시더니 '옥자'를…"이라며 웃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슈퍼 돼지" 옥자를 연기하기 위해 자료 조사에 몰두했지만, 감이 안 잡히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정은은 계속 돌아다니면서 큰 짐승, 작은 짐승, 돼지 소리 등을 발췌했으나 "조사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졌다."
동물과 인간은 소리 기관부터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한계가 있었다. 나중에는 봉 감독에게 너무 노력하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이정은은 '옥자' 촬영 때 냈던 소리를 직접 들려주면서 "감독님이 나중에는 숨소리, 그리워하는 소리 이런 걸 해 달라고 하셨다. (저는) 말도 안 되는 걸 막 한 거다"라고 부연했다.
'옥자' 때부터 '말도 안 되는 것'을 할 거라고 밝힌 봉 감독은 '기생충' 때도 이정은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되게 재미있고 이상한 영화일 거고, 흥미로울 것"이라고. 이정은은 "작업자한테는 (그런) 신비주의가 되게 묘한 매력이다. 뭔가 되게 도전해 보고 싶더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독이 나한테 직접 좋은 역할을 준다는 것만 한 행운이 없지 않나. 그게 무엇이든 간에 해 봐야겠다 싶었고, (영화 보고 나서는) 선택하기를 참 잘한 것 같았다. (상영 후에) 감사하다고 문자를 보냈다"고 덧붙였다.
이정은은 "('기생충'은) 이 이야기의 구조가 너무 좋더라. 부자, 빈자, 그 사이를 보는 방"이라며 "이러한 비밀들이 까발려졌을 때 충격이라든가 거기서 던져지는 메시지라는 게 어떻게 사람들한테 다가갈까… 되게 재밌는 작업이 되겠다고 예상했다. 그건 아마 '기생충' 배우들 전체적으로 다 그랬을 것"이라고 전했다.
◇ 강렬한 씬 스틸러 문광, 첫 촬영 장면은
이정은은 '기생충'에서 박사장(이선균 분)네 집에서 오래 머무른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 역을 맡았다. 이전 주인 때부터 지내왔기 때문에 현재 그 집에 사는 모든 사람 중 가장 집과 잘 어울린다.
봉 감독이 지은 풀네임 국문광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냐고 묻자, 이정은은 "'문(door)이나 광(shed)이랑 상관있는 건가?' 생각하다가 '달(moon)밤의 광녀 이런 건가?' 싶었다"면서도 무슨 뜻인지 봉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진 않았다고.
문광은 고상하고 깐깐해 보이는 초반과 달리 영화 중반 이후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와해되는 인물이다. 이정은은 "가정부로 있을 때 많이 우아함을 가지고 있고 식견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콧소리도 좀 쓰고"라고 웃었다.
덕분에 이번 작품에선 옷도 예쁘게 입었다. 안경을 곁들일 땐 너무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는데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어서 안도한다고.
'기생충'이 높은 인기를 끌면서, 촬영 뒷이야기나 작품에 얽힌 이야기도 모두 관심의 대상이 됐다. 영화의 2막을 알리는 '인터폰 씬'도 마찬가지다. 조금은 엽기적이고 조금은 오싹한 이 장면은, 이정은의 첫 촬영 장면이라고 알려져 관객들을 두 배로 놀랍게 했다.
하지만 인터폰 씬은 그의 두 번째 촬영 장면이었다. 첫 번째 씬은 박사장네서 해고되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강풍기를 하도 세게 틀어놔서 감정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이정은은 "빠리지앙처럼 내려오지 않나. 그때 (강풍기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라며 "그때 첫 촬영이 기분 좋게 풀렸다"고 말했다.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괴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 문광의 모습을 보고 이정은의 친구들은 "너 술 취했을 때 그런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정은은 "술 마신 설정이었는데, (실제로) 술을 많이 먹으면 저는 착한 사람처럼 된다. 제 딴에는 되게 귀엽고 예의 바르게, 그 사람(인터폰 상대)을 안심시키면서 한 건데 무서웠다더라"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씬 스틸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이정은은 '기생충'에 등장할 때마다 대단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하지만 인터폰 씬이 그 정도로 회자할 줄은 몰랐다고 밝혔다.
이정은은 "사람들이 가장 섬뜩한 장면으로 인터폰 장면을 얘기하는데, 저는 그게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그건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조금 웃기지 않을까 했는데 반대로 너무 무섭다는 거다. 난 웃기게 한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 '기생충'의 가장 큰 반전, '문광'네 부부
전원 백수인 기택(송강호 분)네 가족이 박사장네 집에 하나씩 들어가서 나름대로 목적을 달성해 그 분위기에 취했던 때, 예상치 못한 등장으로 평화를 깬 것이 바로 문광이었다. 이정은은 시나리오에서 벽을 미는 장면을 보자마자 '몸을 만들어야 하는데 큰일났네'라는 생각을 했다고.
이정은은 "반전이 어느 정도이겠다, 하는 것까지는 예상을 못 했다. 내가 너무 귀염상인데 이만한(무서운) 효과가 날 수 있을까? 했다. 분장해도 그게 두려웠다. 이런 느낌이 날까 해서"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4년 3개월 17일간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 남편 근세(박명훈 분) 몰래 숨기고 살았다는 게 문광의 비밀이었다. 지하에 펼쳐진 두 사람의 공간에, 문광이 근세를 보자마자 젖병을 물리는 태도에, 관객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젖병을 물렸냐고 물으니 이정은은 "(근세를) 아기처럼 본다기보다는 빨리 떠먹일 수 없으니 도구가 필요했던 것 같다"라며 "모양새가 그로테스크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정은은 "무의미한 공부를 하는, 되게 순박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모르지만 정직하고 부부간 우애는 높다고 설정됐다. 우리가 아이가 없지 않나. 그런데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뭘까 하고 명훈 씨하고 얘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서로 사이가 애틋하다고 하더라도, 남편을 숨기고 지하에 살게 하는 건 주인집에 들키면 바로 '끝장나는' 위험한 시도다.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제가 생각해봤어요. 우리 남편은 나한테 어떻게 할까, 하고. 내가 갇혀 있어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우리 가족이 가족애가 유별나게 더 애틋하고 두터운데 뭐, 그… 제 주변에서 봐도 어떤 장애가 많을수록 끈끈해지는 게 있는 것 같더라고요. 싸웠겠죠. 맨날 칭찬할 수 없잖아요. 근데 햇빛을 못 보고 자유롭지 않다는 것들에 대한 어떤 미안함이 신뢰로 작용한 거 아닐까요.
제가 '빨래'라는 작품을 할 때 장애인을 숨기는 역할이었어요. 문을 걸고 없는 것처럼 했죠. 예전에 월셋방에서 강아지 4마리를 키웠는데 그게 녹록지 않더라고요. 주인이 너무 싫어하니까 비밀스럽게 키웠거든요. 누군가 집에 얹혀살 때 비밀을 가진 사람들은 결속력이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연대감도 생기지 않았을까요."
◇ 이정은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
빈틈없을 것 같이 보이던 문광의 가장 약한 부분이 드러나는 중반 이후, 인물은 더 변화무쌍해진다. 남편의 존재를 숨겨달라고 애원하던 문광은 기택네 가족도 정체를 숨기고 박사장네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태도가 돌변한다.
이정은은 "감독님이 '단말마로 잘라버려라, 아주 빠른 템포로 욕을 한바탕하고 전세 역전을 표현하자'고 하셔서 아주 거침없이 욕을 날렸다. 근데 사람이 생각하면 순간인 것 같다"며 "그런 과감함을 저한테 (연기)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재밌게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칸 공식 상영 때도 화제가 됐던 북한 리춘희 아나운서 흉내 내는 장면은 문광-근세 부부가 평소에 어떻게 놀았을까 상상하다가 탄생했다. 봉 감독은 북한군을 피하고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었으니 북한 관련 농담을 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고.
이정은은 "북한 유머가 어떤 효과가 있을지 이미 (봉 감독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걸 하는) 우리는 조금 심각하다. (관객들은)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지만"이라며 "그 장면이 되게 엉뚱하지만 이 부부의 기이한 행각을 설명해주는 거라고 본다"고 전했다. 실력이 수준급이었다고 하니 이정은은 "그것도 연습을 그래도 해서 그렇다. 저는 비슷한지 아닌지 모르겠다. 연습한 것만큼 그것밖에 못 나오는 것"이라고 냉정하게 자평했다.
이정은은 의외의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그는 "기우(최우식 분)가 남긴 커피잔을 들고 층계를 되게 건방지게 걷는 장면이 있다. 그 집에서 내가 뭐라고… 나도 그 집에 얹혀살면서 과외선생으로 아직 고용이 안 된 청년을 야리면서 커피잔을 딱 들고 가는데 이야~ 그건 좀 (화면에 인물이) 붙어있는 것 같았다"고 답했다.
이어, "그 씬 볼 때마다 짜릿했다. 그런 씬에 희열감이 있다. 짧은 동선인데도 합의 일체, 몰아지경이랄까. 개까지 연기하는 것 같더라"라고 부연했다. 기정(박소담 분)과 기싸움하는 씬을 두고는 "소담이가 '빠져주세요, 아줌마' 할 때 진짜 화나서 '이 어린애가 나를?' 하는 표정이 나왔는데 수습이 안 됐다"며 웃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