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DJ 데이트 비용 부담했던 '평생 동지' 이희호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62년 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해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사진은 93년 8월 12일 김대중씨가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생의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이희호 여사는 1951년 부산에서 '면우회'라는 대학생 모임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1950년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이 여사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 한국전쟁을 맞아 부산에 피난 중이었고 함께 여성운동을 하던 친구 김정례씨의 소개로 이 모임에서 김 전 대통령을 알게 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대학생은 아니었지만 해운업으로 성공한 청년 실업가로 대학생들과 어울렸다. 김 전 대통령은 "여성청년단을 한다면서 곧잘 군복을 염색한 옷을 입고 다녔다"며 "나에게는 그 차림이 오히려 여성스럽게 보였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을 때 그 웃음이 참 예뻤다"고 회고하곤 했다.

이 여사가 김 전 대통령은 다시 만난 것은 1959년 늦여름. 서울 종로 거리에서 김 전 대통령을 우연히 보게 됐다. 앞서 이 여사는 1954년부터 미국에서 유학하며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58년 귀국했다. 1954년과 58년, 59년 선거에서 잇따라 낙선했던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백수'였고 때문에 "데이트 경비는 이 여사가 거의 부담했다"고 김 전 대통령은 밝힌 바 있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기억하는 이 여사는 "이지적이고 활달했지만 교만하지 않았다. 미래가 보장된 여성 지도자였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겸손했다. 자기주장에는 언제나 당당했지만 마음을 열어 남을 배려했다. 진보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고, 시국을 보는 눈이 정확했다." 이 여사는 6남2녀 중 장녀였고, 아버지는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였다.

이 여사는 1962년 5월 10일 김 전 대통령을 남편으로 맞았다. 결혼 두 달 전 쯤 서울 탑골공원에서 김 전 대통령의 청혼을 받았는데 주변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건강이 안좋은 어머니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여동생과 함께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사는 "인품이 훌륭한 사람, 내가 꼭 도와야 할 사람"이라며 흔들리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린 지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이라는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것은 이 부부의 고난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이 여사와 김 전 대통령의 고난은 1972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쿠데타에서 첫 번째 분수령을 이룬다.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망명을 선택했고 이 여사는 국내에서 김 전 대통령의 반유신투쟁을 적극 지원·독려했다. 이 여사는 검열을 피해 인편으로 보낸 편지에서 "박정희씨만이 이 나라에 존재해 있고 그의 명만이 법이요, 모두 죽은 자의 묘지가 돼있는 이 곳에서 숨이라도 크게 쉬면 무슨 소리인가 놀라서 벌을 내릴까 두려워하는 심정입니다. 특히 미워하는 대상은 당신이므로 그리 아시고 더 강한 투쟁을 하시고, 국민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호흡을 크게 쉴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급히 서두리지 마세요"라고 김 전 대통령을 격려했다.

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제주 유세에서 김후보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지원 연설을 하며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1987.12.1 (사진=연합뉴스)
1976년 독재자 박정희를 비판한 3·1구국선언에 김 전 대통령이 참여한 뒤부터 이 여사는 옥바라지에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이 이 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이 여사는 겨울에도 방에 불을 넣지 않았다. 유독 추위를 잘 타는 남편이 감옥에서 추위에 떠는 모습을 상상하면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허용됐지만 가까이 있으면 위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진주에 자주 머물렀고, 교도관을 만나면 부탁하려고 빵이나 과자를 사서 교도소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 여사는 "당신 때문에 특히 겪고 계신 그 어려움 때문에 내 생이 더 값지고 더 뜻 있으며, 많은 사람을 참된 사랑으로 대할 수 있으며, 긍지와 소망으로 내일의 새 빛을 바라보면서 심의(深意)의 가시밭길을 뒤따라 나갈 수 있는 행복마저 느낍니다"라고 옥중의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박정희가 심복의 손에 암살된 뒤에도 시련을 그치지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 일당이 내란음모 사건이라고 조작해 김 전 대통령을 사형수로 엮은 것이다. 하지만 이 때도 이 여사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연행되고 사형수 신분으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보낸 편지에서 "당신도 나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형제들이 철야기도, 산 기도, 골방 기도, 금식기도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내일에 대한 희망을 꼭 가지세요"라고 당부했다.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직후 면회에서 이 여사는 세 아들과 함께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때를 돌아보며 "아내가 그렇게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 없었다. 가족의 믿음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나는 20년을 넘게 지속된 고난을 결코 이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중심에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수감됐던 2년 동안 모두 649통의 편지를 썼다.

이 여사는 1997년 김 전 대통령의 당선 뒤에도 사회적 약자를 잊지 않았으며 특히 여성의 권리를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국민의정부에서 여성가족부가 신설됐고 여성장관과 청와대 여성비서관이 증가하는 등 여성의 공직 진출이 크게 확대됐다. 1998년 가정폭력방지법과 1999년 남녀차별금지법도 이 여사의 노력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년 쯤 지나 출판된 '김대중 자서전'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온 47년의 생애를 매일같이 떠올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내 생이 다하는 그 날까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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