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지역 야학운동과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박관현은 단식투쟁 끝에 목숨을 잃었다.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전두환 신군부의 수배를 피해 2년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 1982년 4월 체포됐다.
'내란 중요 임무 종사자' 등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박관현은 5·18광주민주항쟁 진상 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개선 등을 주장하며 약 40일 동안 옥중 단식투쟁을 벌였다. 오랜 단식투쟁으로 쇠약해진 박관현은 1982년 10월 12일 심근경색 등으로 인해 29살의 나이에 전남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예전 북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단체 북아일랜드공화군(IRA)에 보비 샌즈라는 청년이 있었다. 테러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징역 14년을 선고받은 보비 샌즈는 자신을 테러리스트가 아닌 정치범으로 인정하라며 1981년 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거렛 대처 총리의 보수당 정부는 그의 요구를 묵살했고 보비 샌즈는 66일 동안 단식을 벌인 끝에 숨졌다. 그의 단식투쟁을 소재로 한 영화 '헝거'는 2008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치의 방향을 바꾸는 단식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은 전두환정권의 공포통치에 타격을 가한 최초의 야당 정치인의 저항으로 기록되고 있다. 23일 동안 진행된 김 전 대통령의 단식을 계기로 야권의 양대 계파였던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뭉쳐 이듬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이를 토대로 창당한 신한민주당은 1985년 2·12 총선 돌풍을 일으켰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단식으로 정국을 바꾼 적이 있다. 1990년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은 3당합당을 통해 탄생한 민자당이 지방자치제 약속을 어기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려 하자 그 해 10월 단식투쟁에 나섰다.
13일에 걸친 김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은 1991년 상반기 지방의회 선거와 1995년 6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라는 성과로 나타났다. 지방자치제가 민주주의의 기초라는 김 전 대통령의 오랜 소신에 비춰보면 이 때의 단식투쟁은 1997년 정권교체의 씨앗이 된 셈이었다.
반면 비웃음과 조롱이 대상이 되는 단식이 있다.
때문에 그의 주장은 진지한 고려 대상이 되지 않거니와 릴레이 단식에 대해서도 '간헐적 단식', '다이어트' 등의 조롱과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앞서 무소속 이정현 의원은 새누리당 대표 시절인 2016년 9월 국회의장 사퇴를 요구하는 단식을 벌이다 국민적 비난을 받고 7일 만에 중단했다. 자유한국당은 조해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임명에 반대한다며 릴레이단식·농성을 하다 '웰빙단식' 등의 비판을 받고 슬쩍 접은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