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인 심용환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7일 "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는 반공주의에 근거한 분단사관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사에서 시작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100년 역사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의지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도 "다만 그 과정에서 김원봉으로 논란이 불거져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김원봉에 대한 역사적인 담론은 충분히 펼쳐지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대립각은 분명하다. 한쪽에서는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고문 당해 부득이하게 북한으로 올라갔던 위대한 독립운동가', 다른 쪽에서는 '북한에서 6·25전쟁을 주도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번 논란 역시 어느 시선으로 김원봉을 바라볼 것이냐에 대한 합의가 없어서 생긴 문제다."
심 교수는 "독립운동사 영역으로만 본다면 김원봉은 탁월했던 독립운동가임에 분명하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임시정부 활동이 교착 상태에 빠졌던 1920년대에도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해 난국을 뚫었다. 그 활동이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1930년대에는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민족주의 진영의 가장 큰 세력으로 자리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영역으로만 본다면 김원봉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해방 이후 오늘날 우리네 관점까지 모두 포함했을 때"라며 "'김원봉을 받아들이자'와 '안 된다'는 싸움 안에서 곤란하고 애매해지는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어찌됐든 김원봉이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북한 정권에 협력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독립운동가 시절 김원봉의 행적을 보면 이념적으로 왔다갔다하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독립을 위해 여러 이념을 유연하게 활용했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정체성 문제가 생긴다.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에 들어온 것도 모든 세력을 잃은 뒤 택한 측면이 있고, 이후 내부적으로 자기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으로 민족주의 진영에서 경계했다는 기록이 있다."
◇ "문재인 대통령 애국의 길 타당…김원봉으론 설득에 한계"
심 교수는 "김원봉의 행적을 꼼꼼하게 따진다면 그가 통합의 아이콘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며 "이렇듯 문제적인 인물을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 그로 인해 벌어지는 싸움은 결코 끝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이 강조하는, 이념을 뛰어넘는 애국의 길은 타당하다. 다만 김원봉을 내세우는 것은 논란을 자초하는 측면이 있다. 김원봉은 이념을 적극적으로 좇으면서 활용했던 사람이다. 해방 공간에서 이승만이 반공노선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대립각을 세우고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면, 김원봉 역시 북한에서 그러한 입지를 펼친 것이다. 단순히 '노덕술에 의해 피해를 보고 북으로 올라갔다'는 담론으로는 설득과 동의에 한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결국 "실질적으로 남북 긴장 관계가 해소되지 않는 한, 자유한국당뿐 아니라 개혁을 바라는 시민들 가운데서도 어느 선이 지나면 김원봉을 납득하기 힘든 측면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심 교수의 지론이다.
그는 "김원봉의 의열단 활약상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분명하지만 그의 행적 연구에서는 평가가 갈린다"며 "남북 문제가 선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중심에 있는 역사적 인물을 소환해 정치적 아젠다를 합리화시키는 과정이 낳을 갈등에 대한 걱정이 크다"고 했다.
"(이념을 뛰어넘은 애국과 관련해) 우리에게는 김원봉보다 덜 유명하더라도 충분히 설득 가능하고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많다. 일례로 지청천(1888~1957)은 일제 육군을 탈출해 신흥무관학교 교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해방 이후에도 철저한 민주주의 수호자로서 사회적인 균등성을 강조했다. 그는 자유한국당이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지만, 자유한국당보다 훨씬 미래지향적인 존재다."
심 교수는 "암살과 관련한 의혹이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김구(1876~1949) 역시 우익의 태도를 벗어난 적이 없으나 민족이라는 대의 앞에서 통일을 추구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며 "지금 시점에서는 이러한 인물들을 부각시키고 논쟁을 줄이는 한편 시민들의 힘을 뭉쳐 통합의 길을 열어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