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날은 신분 검사로도 톈안먼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외신기자들이었다. 오전부터 톈안먼 광장으로 들어가려던 외신기자들은 여권 검문에서부터 속속 입장을 거부당했다. 중국에서는 외신기자들을 구분할 수 있도록 별도의 비자를 발급하기 때문에 여권 검사만으로도 외신기자인지 여부를 알 수 있다. 보안 요원은 공공장소 취재를 위해서는 사전에 관할 공안국에 신고해야 한다는 중국 당국의 규정을 들어 외신기자들의 톈안먼 방문을 막았다. 하지만 사전에 취재를 하겠다고 신청해도 허가가 떨어질리 만무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4일은 중국 정부가 언급조차 꺼려하는 ‘톈안먼 민주화 시위’가 벌어진지 3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톈안먼 30주년’을 맞아 역사의 현장을 취재하려던 외신기자들과 이를 막으려는 중국 공안들의 숨바꼭질은 이미 몇 주 전부터 시작됐다. 지난주까지 외신기자들은 여권을 제시하면 톈안먼 광장까지 진입은 허용됐지만, 인터뷰 등 취재로 보이는 행동을 하면 어김없이 공안들이 나타나 광장에서 쫓아내곤 했다. 얼핏 톈안먼 광장에는 수많은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와중에도 중국이 자랑하는 인공지능(AI) 안면 인식 기능이 장착된 고성능 CCTV들은 놀랍도록 빠르고 정확하게 ‘체제에 해가 되는’ 외국인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1989년 6월 4일의 베이징 그리고 그날의 톈안먼은 30년 동안 중국에서 강력한 금기의 대상이었다. 톈안먼의 시작은 그해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과 함께 시작됐다. 강력한 정치개혁을 추진했지만 학생시위에 온정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 등으로 실각한 후 전 총서기는 당시 중국의 대학생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던 소수의 중국 정치인들 중 하나였다.
후 전 총서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대학생들은 후 전 총서기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고, 이는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확산됐다. 대학생들의 시위를 불러일으킨 표면적인 이유는 후 전 총서기의 사망이었지만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초기 급속도로 벌어진 소득 격차와 급격한 인플레이션, 여기에 공산당의 부정부패 등에 대한 일반 민중들의 반감이 뒷받침됐다.
후야오방 사망 당일 저녁 베이징대학에서 추모 대자보가 붙었고, 그 다음날 800여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까지 행진해 헌화하면서 시위에 불이 붙었다. 인민일보가 4월 16일자 사설에서 시위 학생들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자 학생들의 맞대응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를 중심으로 전국의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이 5월 13일부터 톈안먼 광장에 집결하며 시작된 대규모 연좌 농성은 나흘 뒤인 17일에는 100만명 규모로 급격하게 세가 불어났다. 하지만 시위대의 급성장은 비극을 예고했다.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규모에 놀라 무력진압 쪽으로 가닥을 잡은 베이징 지도부는 5월 20일 베이징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리펑(李鵬) 총리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6월 3일 밤을 기해 군을 동원해 시위대에 대한 무력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베이징시는 19일 시민 218명, 군경 23명 등 241명이 사망하고 7천여 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서방 학자를 비롯해 시위 관계자들은 희생자 수가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7년 홍콩 인터넷매체인 ‘홍콩01’은 영국 정부 외교문서를 인용해 사망한 시위대가 1만 명을 넘었다고 주장했다.
◆ 30년간 봉인된 ‘톈안먼’, 중국 역사에서 사라지고 있어
2019년의 톈안먼에서 30년 전 비극의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개혁·개방 정책 성공으로 가파른 경제적 성장을 이룬 중국 수도의 중심지답게 톈안먼 주변은 인민대회당 등 중국식 사회주의를 기념할 만한 웅장한 건물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30년 전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진입하던 인민해방군 탱크들이 지나던 창안제(長安街)는 이제 수많은 차량의 물결만이 오가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더 이상 톈안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중국 정부의 철저한 통제와 톈안먼 희생자들에 대한 탄압의 결과물이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중국 지도부가 톈안먼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규정한 이래 역대 중국 지도부의 톈안먼에 대한 시각은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중국의 인터넷에서는 톈안먼 민주화 시위의 상징인 '탱크맨' 사진은 물론이고 톈안먼을 상징하는 '류쓰(六四)' '5월 35일(5월 31일+4일=6월 4일)' 같은 3200개 이상의 키워드를 검색할 수조차 없다. 중국 내 학계나 문화·예술계 역시 톈안먼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미국과 무역전쟁이 격화된 2019년 중국 정부의 톈안먼 차단은 더욱 철저해지는 분위기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달 31일 톈안먼 사건을 ‘대학살’로 규정한 미국 국무부 논평에 대해 “터무니없는 주장이자 내정 간섭”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미 국무부는 매년 톈안먼 시위 기념일인 6월 4일에 앞서 성명을 내고 인권 문제 개선 등을 촉구해 왔다.
류샤오보 등 역사를 증언해 줄 관계자들도 잇따라 세상을 등지고 있다. 톈안먼 시위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지던 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는 2012년 별세했고 톈안먼 시위에서 학생들을 보호하는 규찰대장을 맡았다가 인민해방군의 총에 맞은 뒤 19년 동안 총알을 몸안에 간직했던 장젠(張健)도 지난 4월 프랑스 파리에서 건강악화로 사망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철저한 부인이 톈안먼의 존재마저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을 중심으로 30년 전 민주화 운동에 대한 추모 열기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1989년 당시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던 홍콩의 활약은 주목할 만하다. 톈안먼 시위가 발생하자 홍콩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시위가 매일 벌어지면서 시위대 규모가 150만 명에 이르기까지 했다. 톈안먼 시위 지도부 인사들이 탄압을 피해 망명길에 오르는 데도 홍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9년 당시 톈안먼 시위를 지지하는 시위를 홍콩에서 주도했던 시민단체들이 연대해 결성한 '홍콩 시민 지원 애국민주운동 연합회'는 몽콕 지역에 '6·4 기념관'을 세우고 꾸준히 톈안먼 정신을 각인시키고 있다. 지난해 홍콩에서 있었던 톈안먼 시위 추모 촛불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1만5천여 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톈안먼 시위 30주년을 맞는 올해 톈안먼에 대한 추모 열기는 더욱 뜨겁다. 홍콩 시민 2천여명은 지난달 27일 홍콩 도심에서 톈안먼 시위 30주년을 기념하는 집회와 거리 행진을 벌였다. 올해 촛불집회에는 지난해 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국의 무력통일론에 반발하며 미국과 반중전선을 이루고 있는 타이완(臺灣)에서도 톈안먼 추모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은 3일 총통부에서 '해외 민주 인사'들을 접견하고 "6·4(톈안먼 사건)와 메이리다오 사건(1979년 타이완의 민주화 시국 사건) 이후 타이완은 민주·자유의 길을 걸어갔다"며 "중국 역시 이러한 길로 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타이완의 중국 담당부서인 타이완 대륙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타이완은 중국 본토를 위해 민주주의로 가는 방향을 계속 가리킬 것"이라며 "모든 면에서 중국이 민주주의로 움직일 수 있게 지지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