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청하려 눈을 감은 지 1시간쯤. 바닥에 깔린 먼지가 날리면서 '컥컥' 숨이 막혀온다. 금세 목구멍 깊이 말라버렸다. 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을 덮고 다시 눕는다.
하루 종일 단 1초도 꺼지지 않는 LED 불빛과 24시간 쉴새없이 오가는 사람들. 5개월을 난 여기서 살았다. '대한민국 인천공항 탑승동 46번 게이트' 앞에서.
새벽 5시, '드르르르 드르르르…' 여기저기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날 깨운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천 소파 6개를 붙여 만든 침대에 '벽'이 생긴 게 아닌가. '(최)윤도 삼촌이 우릴 위해 가려준 거구나.' 너무 좋았다.
"엄마! 일어나 봐요. 윤도 삼촌이 이렇게 해줬나 봐요!" 엄마(바체테.40), 아빠(루렌도.47)를 향해 소리쳤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형(레마.9), 누나(로데.8), 여동생(그라샤.6)도 그때서야 알아챘다. 우리 집이 생긴 것처럼, 우리들은 소파 위를 마음껏 뛰어 다녔다.
사진 찍는 게 싫다. 무조건 싫은 건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날 찍는 게 싫다.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싫다.
배가 너무 아프다. 우유와 시리얼로 만든 아침식사가 먹기 힘들다. 윤도 삼촌이 내 상태를 알아차리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주황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왔다.
스마트폰을 사이에 두고 묻고 답하기를 몇 분. 그러던 중 또다시 검은 옷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윤도 삼촌과 주황색, 검은색 옷의 사람들이 마주보고 섰다. 얘기가 잘 된 모양이다. 윤도 삼촌을 따라 간 곳은 병원이었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아침은 시리얼, 점심과 저녁은 3~4시쯤 햄버거 반쪽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엄마와 아빠는 잘 먹지 않았다. 거의 먹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눈을 뜨자마자 내 손은 한 곳으로 향한다. 스마트폰이다. 전원을 켜고 아침 먹기 전까지 게임을 한다. 식사 후에도 계속한다. 내 유일한 친구는 '스마트폰'이다.
난 게임을 좋아한다. 레마 형은 노트북으로 게임을 한다. 로데와 그라샤는 유튜브로 인형 동영상 보는 걸 좋아한다.
한 번은 '포토'가 왔다. 일본인 여자 아이였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친구였다. 말은 안 통했지만 재밌었다. 로데는 지금도 포토와 영상 통화를 하고 있다. 친구가 보고싶다.
나는 유리 창문으로 한국의 하늘을 바라본다. 파란 하늘로 비행기 수백 대가 날아오른다.
"우리 언제쯤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물어본 적 있지만,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로데는 나가면 '공부'가 하고 싶다고 했다. 난 경찰관이 꿈이다. 레마 형은 고고학자, 로데는 의사, 그라샤는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소파 위에 불어책을 펼쳐 놓고 우리를 가르치신다. 엄마는 여전히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 남매는 엄마, 아빠의 유일한 자부심이자 희망이다.
본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망명해 온 콩고 출신 앙골라인 루렌도 가족. 인천공항에 도착한 지난해 12월28일, 입국은 불허됐고 여권은 압수당했다.
대한민국은 이들에게 단호했다. 이들에겐 난민심사를 받을 자격조차 주지 않았다. 이에 불복해 제기한 1심 재판 역시 이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도 7월에나 열릴 예정이다.
인천공항에서의 다섯달. 특히 열 살도 안 된 두 아들과 두 딸에겐 너무나 힘든 시간이다.
한국은 얼마 전 아동의 인권을 강화하겠다며 아동의 개념을 다시 세웠다. 그런 대한민국에게 이 아이들의 인권만은 예외일 뿐이다.
국제아동인권센터 정병수 사무국장은 "난민신청이 법적으로 적격한 지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머물러야 한다면 그 기간만큼은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관점으로 편의가 제공돼야 한다"며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고, 교육, 의료, 음식 등 모든 게 차단된 상태에서 어떻게 보면 이 아이들은 우리나라에 의해 '제도로 인한 방임' 상태에 놓여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