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에 맞서고자 악이 된 나이제(남궁민 분). 차가운 눈빛과 미소를 지을 때는 악인보다 더 악인같기도 하다. KBS2 '닥터 프리즈너' 속 안티 히어로(다크 히어로)인 나이제가 악의 축인 이재준(최원영 분)을 단죄하는 방법은 기존의 '악인'들이 해왔듯이 교묘하게 법과 자신의 위치와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한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그래서 선(善)이지만 악(惡)의 방식을 따르는 나이제를 표현한 배우 남궁민은 더 흥미롭다.
KBS2 '닥터 프리즈너'(연출 황인혁·송민엽, 극본 박계옥)의 몰입을 높인 요소 중 하나는 나이제 역을 맡아 차갑고 살벌하면서도 그 안에 따뜻함을 녹여낸 연기를 보여준 배우 남궁민이다. 약자들을 향할 때는 걱정 어린 눈빛을 보이지만, 사이코패스 김석우(이주승 분)를 대할 때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궁민은 느릿한 듯하면서도 눌러 담은 목소리로 극에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남궁민은 나이제만의 색을 만들기 위해 "연기를 최대한 절제미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날 남궁민은 인터뷰하며 '만족'과 '부족'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묻어난 단어다. 남궁민에게서 '닥터 프리즈너'를 통해 어떤 부분에서 만족 또는 부족함을 느꼈는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 남궁민이 그려낸 안티 히어로 '나이제'의 절제된 분노
'닥터 프리즈너'는 탄탄한 극본과 연출력, 영화 같은 영상미에 배우들의 연기까지 어우러지며 높은 완성도를 보였다.
남궁민은 "드라마를 고를 때 짜임새를 많이 본다. 개인적으로 내가 대본을 읽으면서 재미없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부정적인 편이다. 연기하는 당사자가 재미없는 대본은 스스로도 재미있게 연기할 수 없다"라며 "1~4회를 봤을 때 흐름이 자연스러우면서 쉴 틈이 없었다. 쉬지 않고 몰아치게 되면 처음 시청한 분들이 나중에 가서도 긴장감을 놓지 않고 볼 수 있겠다 생각했다"라고 '닥터 프리즈너'를 선택하게 된 배경에 관해 설명했다.
극 중 나이제는 태강병원 응급의학센터 에이스에서 재벌가의 횡포에 의해 복수를 다짐하며 서서울 교도소 의료과장 자리를 차지한다. 전반부 엎치락뒤치락하는 수 싸움을 통해 악인 선민식 서서울 교도소 의료과장(김병철 분)을 끌어 내린다. 그러나 나이제의 진짜 목표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재준 태강그룹 총괄본부장(최원영 분)이다. 이재준 본부장을 목표로 한 나이제의 계획은 수년에 걸쳐 큰 그림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나이제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권력을 상대로 한 복수에 성공하며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것 때문에 사실 제 입장에서 보기에도 시원한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직업을 갖고 있거나 일상을 살아가는 분들은 안 좋은 일을 겪어도 생계를 이어나가거나 특정한 이유로 참아야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분들이 보기에 나이제가 비록 현실과 다르게 과장된 캐릭터일 수 있지만, 시원시원하게 복수를 계획해서 실행해나가는 것 자체가 통쾌하고 재밌게 느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나이제가 달랐던 점은 적극적이란 것도 있지만 일단 차분한 스타일이에요. 계획과 절제를 통해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도 그런 디테일을 오버스럽지 않게, 나이제만의 색깔이라고 생각해서 절제된 느낌을 많이 살리려고 했어요. 통쾌하게 복수하지만, 연기는 절제미 있게 하려고 노력했죠."
나이제의 차가우면서도 차분한 말투는 어둡고 푸른빛의 조명과 만나 더욱더 싸늘하게 다가왔다. 비릿하게 웃으며 분노하는 나이제의 표정과 눈빛 때문에 때로는 악당보다 더 악당처럼 느껴졌다. '안티 히어로', 또는 '다크 히어로'의 모습이었다.
◇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 간 서사, 이를 통해 완성된 '나이제'
극 중 장애인 부부의 사망 이후 복수를 위해 서서울 교도소 의료과장이 되기까지 서사는 잠깐씩 나타났지만 구체적인 사정을 미루어 짐작해야 했다. 숨겨진 서사 속에서 나이제는 '복수'를 위해 바닥부터 계획을 다져나간다.
남궁민은 "사실 초반에 그 부분에 관해 작가님하고 많이 상의를 했다. 작품을 하겠다고 해서 작가님, 감독님과 모였을 때 가장 의견을 많이 모으려 하고 이야기를 들었던 부분이 나이제가 지난 3년간 어떤 과정이 있었길래 복수를 하는지가 짜임새 있게 풀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라며 "사실 그게 제일 궁금했다. 이후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계획이 있는지를 자세하게 풀어나가야 주인공이 끝까지 갈 수 있는 행위에 대한 당위성이 생기고 대사 한 마디에 힘이 생긴다. 그런데 깊은 감정선이 담긴 서사가 없다 보니 그런 부분은 아쉬웠다"라고 말했다.
나이제의 못다 푼 서사를 메워 준 것은 선민식 과장과 이재준 본부장이다. 이 두 인물은 나이제의 복수가 정당성을 가지며 극 후반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나이제가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 복수해나가는 데 대한 개연성을 부여하는 게 두 인물이다.
김병철, 최원영 두 배우가 맞붙는 장면이 많았던 만큼 두 배우와 연기에 관한 많은 이야기도 나눴다. 드라마의 시작을 이끌어가는 김병철과 '닥터 프리즈너'만의 색깔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대화를 하고 의견을 나눴다. 그렇게 세밀하게 흐름을 만들어가며 후반까지 이어갔다.
남궁민은 "선민식 과장과 이재준 본부장이 내가 못 가진 주인공의 부족한 부분을 드라마로써 메워 줬다고 생각한다. 단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 배우들의 연기로 잘 극복되었고, 그래서 드라마가 힘을 잃지 않고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라며 "결과적으로 솔직히 매우 만족한다. 모든 분이 최선을 다했기에 끝까지 올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복수의 마무리는 이재준 본부장이 정기이사회에서 쓰러지며 마무리된다. 시청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나이제는 어땠을까.
남궁민은 "나이제의 입장에서 봤을 때 속 시원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이제의 엄마와 장애인 부부를 죽게 만들고, 태강케미컬 노동자 유가족을 죽게 만든 사람이 물리적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걸 나이제는 그냥 뚱하게 지켜본다"라며 "나이제 입장에서는 이재준을 어떻게 하면 더 괴롭고 고통스럽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까지는 보여주지 못하고 끝난 거 같고, 일단 어떤 열린 결말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남궁민은 "나이제를 연기하다보니, 나이제가 생각보다 잔인한 사람이더라"라며 "자기가 고통받은 것에 대해 '내가 느낀 만큼의 고통을 너도 한 번 느껴봤으면 좋겠어'라고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 그런 부분은 좀 무서웠던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남궁민은 그간 KBS와 MBC 단막극은 물론 '내 마음이 들리니'(MBC, 2011), '마이 시크릿 호텔'(tvN, 2014), '미녀 공심이'(SBS, 2016), '김과장'(KBS, 2017), '조작'(SBS, 2017), '훈남정음'(SBS, 2017) 등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하며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그렇게 20년을 걸어왔기에 남궁민 앞에 붙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시청자에게는 '믿고 볼 수 있는'이 됐다.
남궁민은 스스로 담금질도 많이 하고 반성도,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작품을 하며 자신의 연기에 대한 메모도 잊지 않는다.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도 A4에 100장 이상 적은 것 같아요. 부족한 부분, 앞으로 하지 말아야 할 부분, 깨달은 부분 등을 말이죠. 지금 너무 부족하지만, 부족한 나를 채워가려고 노력하는 게 저인 거 같아요. 어떤 '완성형'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부족함을 채워가려는 거죠.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것보다 제가 봤을 때 저의 모습이 어떤 가가 중요해요. 다른 사람들이 잘 했다고 해도 내가 부족함을 알았다면 마냥 기뻐할 수 없는 노릇인 거죠."
'닥터 프리즈너'도 마찬가지다. 남궁민은 어떤 부분은 잘하고, 또 어떠너 부분은 못한 게 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라는 게 자신에 대한 남궁민의 평가다.
남궁민은 "정말 연기하면서 느끼는 건 연기가 어렵다는 것"이라며 "특히 드라마의 반응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 자신을 평가해야 하다 보니 정말로 매 장면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방송이 나가고 반응이 좋게 나오니 잘하고 있구나 하면서 나한테 조금 관대해졌다"라고 말했다.
늘 부족함을 느끼는 남궁민이 만족하는 순간은 최선을 다했을 때다. 그는 "마지막에 드라마가 끝나고 난 다음,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드라마를 하면서 쏟아부을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건 정말 나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하는 거 같다"라고 말했다.
아마 매 작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내며 최선을 다하기에 부족함도, 만족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매번 자신의 부족함을 찾고 만족을 위해 노력하기에 시청자도 이번에는 남궁민이란 배우가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하게 되는 것 아닐까.
"저는 일단 끝까지 열심히 노력하고 싶어요. 배우로서 노력을 게을리하고 싶지 않아요. 게으른 배우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부족하다는 걸 항상 느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래야 저도 항상 바쁘게 움직일 테니까요. 스스로가 '좋았어', '만족해', '이번 연기대상은 나지' 이러는 순간, 그 순간은 필과 자신감이 충만해서 더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죠.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부족함을 알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싶어요. 할 줄 아는 것도 연기밖에 없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