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 1 (18:15~19:55)
■ 방송일 : 2019년 5월 10일 (금요일)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김경훈 (로이터통신 기자)
◇ 정관용> 지난달에 사진기자로서는 한국인 최초로 퓰리처상 수상자가 나왔어요. 국제 통신사죠, 로이터통신에서 일하는 김경훈 기자가 그 주인공인데. 얼마 전에 직접 세계 곳곳을 누비며 취재한 이야기, 또 그동안 시대를 바꾼 여러 사진 이야기를 담아서 '사진을 읽어드립니다' 이런 책도 내셨네요. 그래서 오늘 스튜디오에 직접 초대했습니다. 로이터통신의 김경훈 기자 어서 오십시오.
◆ 김경훈> 안녕하세요.
◇ 정관용> 우선 축하드립니다.
◆ 김경훈> 감사합니다.
◇ 정관용> 퓰리처상이 어떤 상이죠?
◆ 김경훈> 퓰리처상은 언론인들 사이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은 받아보고 싶은 상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데요. 퓰리처라는 미국의 언론 재벌의 이름을 딴 상이고요. 이분이 돌아가시면서 1900년대 초기에 이제 언론학이 아직 제대로 자리 잡기 이전에 자신이 한때 신문왕으로서 많은 돈을 버셨던 분인데 언론 교육에 써달라는 의미에서 콜롬비아대학에 많은 기부를 하셨고요. 그러면서 언론 좋은 보도들이 많이 나오도록 장려하는 의미에서 좋은 보도에 대해서 상을 주는 그런 퓰리처상을 만든 겁니다. 퓰리처상은 상을 받을 수 있는 대상 자체가 미국의 언론사이면서 미국에 뉴스가 보도된 그런 뉴스만 한정돼 있는 그런 상입니다.
◇ 정관용> 미국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 김경훈> 그렇습니다.
◇ 정관용> 김경훈 기자는 언제부터 로이터통신에서 일했어요?
◆ 김경훈> 로이터통신에 들어가게 된 건 2002년도고요.
◇ 정관용> 2002년. 그전에는 국내...
◆ 김경훈> 네, 국내 신문사에 있었습니다. 대학교...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때부터 사진기자가 되고 싶은 꿈을 가졌고요. 그래서 대학교에서도 사진학과에 들어가서 보도사진을 공부했고요. 그래서 원했던 대로 국내 신문사에 들어가서. 당시에는 한국일보사 소속이었던 일간스포츠에서 일을 하면서...
◇ 정관용> 사진기자 하셨고.
◆ 김경훈> 그렇습니다.
◇ 정관용> 로이터통신으로 가셨고.
◆ 김경훈> 네, 맞습니다.
◇ 정관용> 로이터통신으로 가신 이유는?
◆ 김경훈> 제가 99년도에 한국 신문사에 들어가서 주로 이제 스포츠나 연예. 이런 걸 많이 취재했었고요. 그러는 과정에 로이터통신 쪽에서 저한테 좀 제안이 왔었는데 좀 더 다양한 취재를 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해서 옮기게 됐습니다.
◇ 정관용> 이번에 퓰리처상을 타시게 된 사진은 중남미지역 불법이민. 그 현장 사진이더라고요.
◆ 김경훈> 맞습니다.
◇ 정관용> 그건 언제 취재하시고 찍으신 거예요?
◆ 김경훈> 작년 11월에 제가 멕시코에 출장을 가서 두 주 반 정도를 멕시코시티에서 티후아나라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까지 같이 캐러밴(중남미 출신 이민자 행렬), 중남미 캐러밴들을 이동을 하면서 취재했던 사진이고요. 저희 취재 출장의 마지막 일정으로 그들이 큰 평화시위를 기획했었는데 그 평화시위 도중에 우발적인 상황이 발생하면서 그 평화시위에 참여했던 수천 명이 다 트럼프가 언제나 이야기하는 국경 장벽으로 뛰어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 정관용> 시위를 하다가 국경을 넘자 이렇게.
◆ 김경훈> 넘자고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요. 개중에는 진짜 넘었다가 최루탄으로 대응을 하니까 돌아왔던 사람들도 있고요. 하지만 어떤 큰 목적을 가지고 갔다기보다도 갑자기 한 무리가 뛰기 시작하니까 군중심리로 저기 뭐가 있나 보다 하고 다들 뛰어가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 정관용> 우발적으로. 갑자기 아수라장이 펼쳐졌겠네요?
◆ 김경훈> 네, 그렇게 해서 그 한 지역에만 있던 게 아니고 장벽을 따라서 넓게 당시 캐러밴들이 흩어져 있었고요. 그중의 한 그룹을 제가 계속 쫓아다니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국경의 건너편에 있던 국경수비대가 상황이 점점 사람이 더 모이게 되고 통제하기 힘들어질 것 같으니까 이제 최루탄으로 대응을 한 거고요. 그 상황이 제 사진에 포착된 겁니다.
◇ 정관용> 제가 지금 그 사진을 보고 있는데 최루탄 연기가 막 피어나고 어떤 여성분이 어린아이들 손을 붙잡고 마구 달리고 있고. 그런데 하필 또 겨울왕국 애니메이션 주인공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고.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사진이더라고요. 딱 찍는 순간 이건 뭔가 작품이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드나요?
◆ 김경훈> 글쎄요, 저희가 보도사진에서는 작품이라는 용어는 안 쓰니까요. 작품이라기보다는 찍는 순간에 아무래도 사진기자 일을 거의 20년 가까이 해 왔으니까요. 그날 벌어졌던 사건을 제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진이 되리라는 건 찍는 순간에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워낙 급박한 상황이고 저희가 사진을 찍을 때 모든 디테일을 다 파악할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사진이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가 아이들이 기저귀를 차고 있거든요.
◇ 정관용> 그러니까요.
◆ 김경훈> 그리고 엄마는 말씀하신 대로 겨울왕국이라는 디즈니 티셔츠. 꽉 끼는 옷을 입고 있고요. 뒤로는 하얀 최루탄에서 쏟아져나오는 하얀 연기와 그리고 국경의 장벽이 보이거든요. 그렇게 해서 실제 캐러밴에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전에 저희가 갔을 때만 해도 긴장감이 많이 고조됐던 이유가 트럼프 대통령이 계속 트위터에 거친 사람들이 오고 있다. 그리고 갱단이 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대응을 해 왔거든요. 그렇게 됐는데 제 사진에 포착된 캐러밴들의 모습은 기저귀를 찬 어린아이들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어떤 인권 문제를 가장 중요시여기고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던 미국의 지성인들이 어린이에게까지 최루탄을 쏜 건 너무하지 않았나. 그러한 반응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정관용> 또 거친 사람, 갱단이 오고 있다는데 무슨 기저귀 찬 갱단이 있느냐. 이런 비아냥들이 나왔겠죠.
◆ 김경훈> 맞습니다.
◇ 정관용> 지금 현재는 어디에 소속돼 계십니까?
◆ 김경훈> 지금은 로이터통신 도쿄지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도쿄지국. 그러면 중남미 사진 찍으실 때는 소속이 달랐었어요?
◆ 김경훈> 아닙니다. 도쿄지국에 있었고요. 저희 로이터통신에서는 특히 저희 사진부 같은 경우는 회사에서 이런 국제적으로 큰 뉴스. 중장기 프로젝트를 취재를 할 때는 다양한 지국에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진기자들을 일부러 보냅니다. 왜냐하면 저희 로이터통신에서 가장 중요한 게 중립적인, 객관적인 보도를 하는 건데요.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 자기 출신 국가나 출신 종교나 출신 어떤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서 캐러밴 사태를 보는 시각이 다를 수가 있잖아요.
◇ 정관용> 그렇죠.
◆ 김경훈> 이러한 다양한 시각을 공정하게 보여주는 게 저희 회사의 사풍이기 때문에. 당시 저는 아시아에서는 제가 뽑혀서 갔었고요. 또 팔레스타인에서 왔던 친구도 있었고 그리고 유럽에서 유럽의 난민 문제를 오랫동안 취재했던 친구도 있었고요. 또 남미 출신 사진기자들이 처음부터 캐러밴 문제를 함께 출발지점부터 같이 쭉 동행했던 기자들도 있었고 미국에서 온 기자분도 있었습니다.
◇ 정관용> 대단한 원칙이네요. 사실 중남미 지역이면 그 지역 지국 소속 기자들이 가는 게 당연해 보이는데 뭔가 편견을 배제하기 위해서 일부러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을 뽑아 보낸다.
◆ 김경훈> 편견도 배제하고 그리고 조금 더 효과적이고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기 위한 저희들 로이터통신만의 취재방식입니다.
◇ 정관용> 그냥 괜히 로이터가 아닙니다, 말씀 들어보니까.
◆ 김경훈> 감사합니다.
◇ 정관용> 전 세계를 다니셨겠네요, 그러면 그동안에?
◆ 김경훈> 전 세계를 다녔다는 표현보다는 그래도 안 가본 대륙은 없고요. 그래도 아무래도 로이터 서울지국에서 시작을 했고 그리고 도쿄지국이랑 중국지국에 있었고 아무래도 현지 언어를 하는 게 있기 때문에 주로 아시아 지역에 많이 있었고 하지만 올림픽이나 월드컵 그리고 이번 멕시코, 이런 캐러밴 이런 걸로 해서 많은 나라를 가보기는 했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사진기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종군기자거든요. 혹시 전쟁터에도 가셨나요?
◆ 김경훈> 전쟁터는 갈 기회가 한 번 있었는데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취재하게끔 돼서 저도 회사에서도 저한테 가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봤고 저도 그 당시만 해도 사진기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로버트 카파의 사진을 고등학교 때 보고 그런 인생을 살고 싶어서 사진기자를 지망했었던 거거든요.
◇ 정관용> 어떤 사진으로 유명하죠?
◆ 김경훈> 로버트 카파는 스페인 내전 당시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어느 병사의 모습을 찍어서 유명했고요.
◇ 정관용> 지금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 김경훈>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취재했던 유일한 사진기자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 있지 않습니까? 거기 오프닝 시퀀스에 나오는 그 장면들이 스필버그 감독이 밝힌 바에 의하면 로버트 카파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얻어서 그 잔혹한 전쟁 장면을 재현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사진기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고요. 그렇게 됐는데 아프가니스탄에 가는 준비를 다 거의 하고 있는 상태에서 태국에서 그때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계엄령이 선포됐었습니다. 그때도 일본지국에 있었는데 그때 일본인이면서 저랑 제일 친했던 로이터통신의 카메라맨과 함께 취재를 하던 도중에 제가 형이라고 불렀던 분인데. 총을 맞고 돌아가시게 됐어요, 저랑 같이 있던 현장에서.
◇ 정관용> 태국에서?
◆ 김경훈> 네.
◇ 정관용> 시위 진압 과정에?
◆ 김경훈> 네 시위 진압 과정, 대치하는 과정, 정부군과 반정부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목숨을 걸고 취재한다는 게 숭고한 일이기는 하고 그리고 그 형도 그날 저랑 있으면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진정한 저널리즘이라는 얘기를 몇 번 했었거든요. 그래서 다 좋긴 하지만, 하지만 나의 목숨을 걸고 취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단지 전쟁이라는 어떤 로망을 가지고 가는 것보다는 내가 정말 취재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 나의 스토리가 있을 때 가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는 가지를 않았고요. 지금도 혹시라도 내가 살고 있는 곳, 내가 그 지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내가 정말 취재해 보고 싶은 지역에 분쟁이 있다면 지금도 언젠가는 가보고 싶습니다.
◇ 정관용> 김경훈 기자가 찍었던 사진 중에 세계적으로 놀란, 화제가 됐던 사진들이 몇 개가 있다고 그래요. 저도 자료를 좀 보니까 중국 시진핑 주석과 일본 아베 총리가 악수하고 있는 사진. 이게 상당히 주목을 받았었는데 그건 왜 그렇게 됐습니까?
◆ 김경훈> 그 당시에는 제가 로이터통신 베이징지국에 있었고요. 그때 베이징에서 APEC 국제회의가 열리면서 각 나라 정상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상당히 안 좋았었거든요. 반일 감정, 중일 감정이 양국 사이에서 되게 팽팽한 상태였고요. 그리고 그 두 명의 정상들이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이제 스트롱맨이라고 부르는 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정상들이 취임 후에 처음으로 만나는.
◇ 정관용> 처음 만남이었어요?
◆ 김경훈> 네,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국제무대에서의 첫 만남이었는데. 보통 우리가 신문이나 언론에서 봐왔던 정상들의 사진은 속마음이 어떻든지 간에 서로 웃으면서 악수를 하잖아요. 그런데 둘이 그 장면에서도 서로 시선도 외면을 하고 악수를 하고 있는데 아주 냉담한 기류가 흐르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그걸 간파를 했고요. 그래서 그 1장을 찍어서 재빨리 저희가 전 세계로 타전을 했었는데 그게 양국 관계를 보여주는 어떠한 심볼적인 의미가 되어서 당시 많은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 정관용> 진짜 전혀 안 웃고 눈도 안 마주쳤어요?
◆ 김경훈> 네, 아이컨택트를 피하고 웃지도 않고. 국제무대에서는 방문객의 국가원수가 먼저 오기보다 주최국의 원수가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요. 그때는 아베 총리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고 아베 총리는 웃으면서 악수할 준비가 돼 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시진핑 중국 주석이 전혀 쳐다보지도 않고 악수만 하고 그리고 그 이후에 이제 회담장으로 들어갔는데 회담장에서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가 상당히 무미건조한 얘기들을 주고받아서 저는 그때 사진을 보내면서 그날에 있었던 뉴스를 1장의 사진으로 잘 담아냈다는 그런 느낌은 들기는 했었습니다.
◇ 정관용> 이런 각국 정상 취재는 일반 다른 사진 취재와 좀 다른 특징이 있습니까?
◆ 김경훈> 일단 아무래도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이미지에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 안전 문제도 있고 해서.
◇ 정관용> 경호상의.
◆ 김경훈> 경호상의 문제가 있고 그래서 동선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사진기자들도 그 정해진 동선 안에서.
◇ 정관용> 딱 정해진 위치에서.
◆ 김경훈> 그 위치에서 찍어야 하고.
◇ 정관용> 그런데 그 위치에서 서로 좋은 자리 잡으려고 몸싸움 안 해요?
◆ 김경훈> 몸싸움도 하죠. 왜냐하면 서로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는 같이 일해 왔으니까, 아니까 서로 양보도 하는데 다른 나라에서 정상과 함께 온 사람들은 그 나라만의 다른 취재 룰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고요. 예를 들어 제가 있는 일본에서는 모든 걸 다 줄세우기를 좋아해서 다 자리를 다 테이프로 마킹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외국에서 온 기자들은 그런 문화가 없기 때문에.
◇ 정관용> 막 뚫고 들어와요?
◆ 김경훈> 뚫고 들어오고. 그러다 보면 약간의 몸싸움도 있기는 한데. 하지만 서로의 암묵적인 룰은 다들 지키는 편입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그렇게 딱 정해진 위치에서 경호상의 경로가 딱 있으니까. 그렇게 사진을 찍으면 아무래도 좀 무미건조하고 재미없을 것 같아요.
◆ 김경훈> 그게 저희 사진기자들이 해야 될 부분인데요.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걸 그대로 찍게 되면 저희가 결국은 홍보사진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런데 저널리즘이고 포토 저널리즘이 돼야 되기 때문에 그날에 이 사람들의 벌어지고 있는 스토리 그리고 두 명의 정상이 결국은 두 나라 관계를 대표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쩔 때는 두 나라 관계가 친밀할 수도 있고 아까 말씀드린 아베 일본 총리나 시진핑 국가주석처럼 서로 냉담한 기류가 흐를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런 거를 잘 파악하고 그런 사진을 취재해서 적절한 캡션과 함께 보내는 게 저의 일입니다.
◇ 정관용> 글 대신 사진 한 장으로 글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담아내야겠다. 그런 맥락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겠군요.
◆ 김경훈> 맞습니다.
◇ 정관용> 얼마 전에 책을 펴내신 걸 보니까 '사진을 읽어드립니다'라는 책이고. 첫 챕터가 일본군 종군 위안부 문제를 다뤘더라고요. 왜 그걸 첫 부분에 다루셨나요?
◆ 김경훈> 일단 제가 개인적으로 위안부 생존자분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이 있었고요. 그리고 이 책은 제가 사진기자 활동을 하면서 가장, 특히 그러면서 필름시대에서부터 사진을 배우고 사진기자를 시작해서 지금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디지털 사진시대에 살고 있는데. 그러면서 사진이 예전에는 어떤 기술적인 관점에 사진의 역할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의 한 방편이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사진이 어떤 언어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언어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내용을 가지고 책을 썼는데 사진 한 장 한 장은 언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오래된 흑백사진은 미국 문서보관소에 기록돼 있는 사진인데. 지금의 버마지역에서 당시 미군과 중국군의 연합군에게 일본군이 거의 전멸에 가까운. 퇴패를 한 뒤에 거기서 발견된 종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사진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이 제가 중고등학교 때도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렸던 사진이에요.
◇ 정관용> 임신한 여성 한 분 있는 사진 있잖아요. 우리도 다 본 사진이죠.
◆ 김경훈> 그런데 저도 그 사진을 수없이 봐왔지만 그 사진 속의 인물들이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고 그리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제가 일본에 가서 당시에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양심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와세다대학교 안에 종군 위안부들을 기리기 위한 조그마한 박물관을 만들었어요. 거기 박물관에 갔더니 그 사진에 대한 설명과 그 여성분이 어떤 분이셨고 나중에 그 여성분이 그 사진을 직접 보시고 본인이라고 얘기했다는 그런 내용을 다 전시를 해 놨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우리의 역사의 한 부분이고 우리의 역사가 담겨져 있는 사진인데 그 사진 속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를 나도 모르고 있었고 많은 분들이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그 이야기를 제 책의 첫부분에 넣었습니다.
◇ 정관용> 직접 일본군 성범죄 피해자들을 취재하며 사진도 찍고 하신 적 있나요?
◆ 김경훈> 네, 그건 제가 중국 지국에 있을 때인데요. 광복 70주년을 맞이해서 기획취재로 위안부 생존자들을 제가 하는 기획취재를 생각을 해서 취재하게 된 건데요. 당시 중국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8월 15일은 우리에게는 광복절인데 중국은 몇 년 전부터 8월 15일이 국가 국경일이 아닌 걸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중일전쟁이죠. 중일전쟁은 자신들이 승리를 한 전쟁이거든요. 그런데 8월 15일을 우리가 광복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날 일본의 천황이 흔히 옥음이라고 하는 라디오 성명을 발표하면서.
◇ 정관용> 항복했잖아요.
◆ 김경훈> 그런데 정확한 내용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거든요. 그렇게 하니까 중국에서는 우리가 전쟁에 이긴 날은 9월 3일. 미군의 군함인 미주리함에서 중국의 군 수뇌부들이 일본군 수뇌부들에게 항복문서에 조인을 받은 날이 그들의 승리의 날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우리에게는 8.15라는 게 어떤 식민지의 치욕도 있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여러 가지 오버랩되는데 그들에게는 승리의 날로 기억이 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자기네들이 승리한, 이긴 전쟁인데 자기들의 여동생과 딸들이 일본군에 의해서 성노예가 됐다는 사실을 별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 정관용> 감춰요?
◆ 김경훈> 정확히 말하면
◇ 정관용> 그냥 주목하지 않는다, 중국 언론들은.
◆ 김경훈> 중국 언론도 그렇고 중국 정부의 차원에서도 정확한 집계도 없고요. 그렇게 해서 몇몇 뜻 있는 시민단체라든가 향토사학자분들의 도움을 얻어서 생존자분들을 몇 분 취재를 했는데요.
◇ 정관용> 그러니까 중국 여성들이네요.
◆ 김경훈> 중국, 당시 산시성에 사시는 분들 중에 성노예 피해자분들을 취재를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그분들도 과거에 많이 힘드셨지만 90년대 이후에 많이 국가적인 조명도 있었고 그리고 그분들을 도와드리려는 후원도 많이 있고 그랬고 집회도 있고 했는데 그분들은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어 있더라고요.
◇ 정관용> 그냥 소외돼 있군요.
◆ 김경훈> 그래서 많은 분들이 우리 할머니들과 마찬가지로 힘든 과거를 겪으셨지만 노년은 더더욱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봐서 취재를 하면서 눈물이 났던 몇 안 되는 취재 중에 한 부분이었습니다.
◇ 정관용> 특히 사진기자들이 전 세계에 다니면서 취재하게 되는 현장이 기쁘고 즐거운 현장보다는 왠지 좀 참혹하고 슬픈 현장이 많지 않나요?
◆ 김경훈> 글쎄요. 빈도를 보면 재미있고 즐거운 취재현장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 사진 한 장만 보시고 저를 알게 되신 분들은 매일 이런 곳만 취재를 다닌다고 생각을 하시는데요.
◇ 정관용> 뭐죠?
◆ 김경훈> 그러니까 멕시코나 이런 약간 긴박하고 이런 힘든 곳만 다닌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런 거는 1년에 한두 번 정도고요. 주로 일본이나 중국지부, 서울지부에 있을 때는 우리나라 신문사 기자처럼 정치, 경제 뉴스도 하고 때로는 연예인 취재할 때도 있고요. 그리고 때로는 밝은 뉴스도 취재를 하고요. 하지만 아무래도 슬픈 뉴스, 힘든 뉴스를 하게 되면 저희도 감정 이입이 많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게 좀 기억이 많이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 정관용> 20여 년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취재는 뭐라고 기억되세요?
◆ 김경훈> 하나를 뽑는 것은 힘들고요.
◇ 정관용> 몇 가지 정도.
◆ 김경훈> 세월호 취재가 저는 개인적으로 참 힘들었습니다.
◇ 정관용> 그때 한국에 와서.
◆ 김경훈> 그때는 제가 중국지국에 있었는데 요새는 다 인터넷이 되고 하니까 저도 스마트폰으로 한국 뉴스를 계속 보는데 뉴스속보로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 그래서 제가 언제나 한국에서 무슨 큰일이 벌어지면 제가 언제나 취재지원을 나왔기 때문에 한국에 올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비행기표도 알아보고 그러고 있는데 얼마 뒤에 속보로 전원 구조, 무사히 구조되었다. 그 속보를 저도 보고 아, 다행이다 하고는 출장 준비를 다 취소하고 있었는데 다시 상황이 반전되어가지고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알려지기 시작을 했고 그래서 그날 다시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끊어서 김포공항에 내리니까 새벽 거의 12시, 자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지국에서 준비해 놓은 차를 바로 픽업을 해 가지고 같이 왔던 일본인 기자랑 교대로 운전을 해 가면서 새벽 5시 진도에 도착을 했는데 제가 아무래도 저도 아이가 있는 입장이다 보니까요. 세월호에서 피해를 당한 학생들보다는 많이 어리지만 아버지 입장으로서 참 감정이입이 많이 되고, 그 부모들에게. 그래서 심리적으로 상당히 힘든 취재였고 저뿐만 아니라 아마 우리나라 국민들도 많은 그런 걸 느꼈을 겁니다.
◇ 정관용> 국민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죠. 그러니까 바로 세월호 바로 그다음 날 도착하신 거네.
◆ 김경훈> 맞습니다.
◇ 정관용> 며칠 정도 거기 계셨어요?
◆ 김경훈> 한 열흘 이상 있었던 것 같고요. 제가 막 도착을 해서 그 취재단에게 배에 접근할 수 있는 그런 걸 해경 측이 마련해서 그 배를 타고 가니까 배의 마지막 끄트머리 정도만 물에 떠 있는 상황이었고요. 며칠 동안은 학부모들께서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 상황을 보면서 눈물이 막 나가지고요.
◇ 정관용> 또, 또 어떤 게 기억에 남습니까? 세월호 취재 말고 힘들었던 거.
◆ 김경훈> 세월호 취재 말고는 아까 말씀드렸던 태국에서 그런 일을 겪었을 때는.
◇ 정관용> 선배가 옆에서 총 맞아 사망하는...
◆ 김경훈> 내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해야 하는 가치가 있는 일일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겪었었는데. 그 이후에 제가 약간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 때 직후에 몇 달 후에 일본에서 동북아 대지진이 났습니다. 그렇게 돼서 쓰나미가 여러 마을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다 휩쓸고 가고, 그리고 후쿠시마에서 방사능 문제까지 돼서. 제가 그 당시에 로이터 취재진 중에서 가장 먼저 후쿠시마 지역에서 피난 나오는 방사능 난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분들을 취재를 하기도 했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그래도 아직까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구나, 그 계기가 돼서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사진기자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앞으로 꼭 이건 내가 한번 취재해 보고 싶다. 이 사진은 꼭 찍어보고 싶다 하는 그런 현장이나 대상, 인물이 있다면.
◆ 김경훈> 꼭 해 보고 싶은 것은 북한 관련 취재를. 그런데 10여 년 전에 한 번 제가 북한 취재를 갔었는데 여러 가지 제약도 많이 있었고요. 북측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그런 취재 말고 한번 진짜 북한의 속살을 제가 한번 제대로 취재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 정관용> 남북 관계가 좋아지고 북핵 문제가 풀려야 그건 가능하겠죠?
◆ 김경훈> 네, 그럴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김경훈 기자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사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진기자로서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 수상자 로이터통신의 김경훈 기자였어요. 오늘 고맙습니다.
◆ 김경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