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편네가 집에서 밥이나 할 것이지, 어딜!"이라고 시비 거는 조폭을 옆차기 한 방으로 기절시키며 "쌀 사러 나왔다!"라고 일갈하는 주인공. 40대-20대 여성 경찰인 두 주인공에게 "늬들 때문에 미치겠다. 제발 주제에 맞게 행동해라"라고 하는 상사. 철부지이긴 하지만 사건 해결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는 주인공의 남편. 놀라운 해킹 실력을 갖춘 조력자 입에서 나오는 대사는 "자자, 선수 입장"…
내일(9일) 개봉하는 영화 '걸캅스'(감독 정다원)의 시나리오 유출본이라며 온라인상에 나돈 게시물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위와 같다. 흔히 '경찰 영화'라고 불리는 수사극이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코미디에 나올 법한 상황과 대사를 엮은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가상 글을 보고 "대본 유출 수준이네요 ㄷㄷ"이라고 하는 호들갑은 '걸캅스'가 그저 그런 영화일 거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개봉도 전에 김을 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다원 감독은 언론 시사회에서 "되게 재밌게 봤다"면서도 "그런 분들도 많이 와서 봐주셨으면 좋겠다. 제가 어떻게 클리셰를 비껴나가나, 오그라들 때 어떻게 빨리 빠져나가나 하고"라고 답했다.
'걸캅스'로 장편 상업영화에 데뷔한 정 감독의 답변은 단순한 호언장담이 아니었다. 수사극이라는 골조에서 어쩔 수 없이 등장하는 상황 설정이 있긴 하나, '걸캅스'는 관객들에게 흔치 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단 전·현직 여성 경찰 두 사람이 수사를 주도한다는 얘기 자체가 그동안 '못 보던 것' 아닌가.
왕년엔 '전설의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으나 지금은 퇴출 0순위 주무관인 박미영(라미란 분)과 정의감이 넘쳐 같은 팀에서도 사고뭉치로 취급받는 초짜 형사 조지혜(이성경 분). 신종 마약을 동원한 성범죄 사건을 우연히 접하고 힘을 모아 이를 해결해 나간다는 게 '걸캅스'의 줄거리다.
'걸캅스'는 정·재계 거물급 인사가 엮인 핵폭탄급 범죄를 다루지 않는다. 극중 남자 형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적에는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사건에 주의를 기울인다. 너무 자주 일어나서 여성들에겐 '일상적인 공포'가 됐지만, '거대악'의 악함을 강조하느라 뒷전으로 밀리거나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동원되는 정도로 다뤄졌던 성범죄 그중에서도 디지털 성범죄다.
극중 상황도 그렇지만, '불법촬영'은 피해자가 스스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할 만큼 치명적인 범죄다. 좋아요 3만 개가 모이면 불법촬영 영상을 공개하겠다는 우준(위하준 분) 일당을 막으려고 미영과 지혜는 동분서주하지만, 주변 상황은 녹록지 않다.
누군가는 '처벌해 봤자 벌금형 나오고 만다'고 체념하고, 누군가는 워낙 관련 범죄가 잦아 처리할 건 많은데 일손이 달린다며 불평한다. 영화 밖 현실의 어려움이 극 안에 실감 나게 펼쳐진다.
수사할 의지가 있는 쪽이 저 정도지, '깜도 안 되는 건'이라고 눙치려는 무리도 있다. 지혜와 함께 일하는 선배 형사들이 그렇다. 실적 올리기에 도움 되는 현장엔 자기들만 출동한다. 미영과 지혜가 애쓴 덕에 마약 판매상을 검거하게 됐으면서도, 그 마약이 동원된 2차 피해(불법촬영 및 유포)는 별것 아닌 듯 취급한다.
말로 다 못 할 어려움을 겪어 막막할 때 믿고 찾는 곳이 '경찰'인데, 중요하거나 실적 계산에 유리한 사건과 아닌 사건으로 나누는 게 맞느냐는 이 '상식적인 질문'을 하는 건 지혜다. 팀 선배들은 지혜를 아무것도 모르면서 섣부르게 나서 일을 그르치는 '꼴통'쯤으로 보아도, 정작 '민중의 지팡이'로서 경찰의 역할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건 지혜였다.
살림과 육아를 병행하며 자기 일을 향한 욕심으로 노력한 끝에 민원실의 주무관이 됐지만, 안도할 시간은 짧다. 극중 1974년생인 미영은 '퇴출 0순위'로 권고 사직이 코앞에 와 있는 상태다.
경찰이라는 직업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자부심을 느꼈으나 만만찮은 현실에 순응하며 살던 미영에게,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다시 '수사의 주축'으로 현장에 나가는 경험은 너무나 중요했다. 다시 '일하고 있다'는 설렘으로 생기를 찾은 미영의 얼굴은 특히 여성 관객들의 공감을 사지 않을까.
미영-지혜의 비공식 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력자 장미(최수영 분)는 웃음 담당이다. 해킹 실력만큼이나 뛰어난 입담으로 말맛을 살린다. 미영-지혜-장미의 '티키타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민원실과 교통 상황실에서 제 몫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주는 뿌듯함과, 얄밉게만 보였던 민원실장(염혜란 분)의 숨은 면모도 놓치지 말 것.
지나치게 현란하지 않아 오히려 현실감을 높이는 라미란의 액션, 긴 팔다리를 활용해 날렵함이 눈에 띄는 이성경의 액션, 한국 영화 최초로 서울 강남 도산대로를 통제하고 찍은 카 체이싱 장면, 능란하게 혹은 허를 찌르며 웃음을 유발하는 대화 등 오락 영화에 기대하는 볼거리 마련에도 충실하다.
무엇보다 의외의 배우들이 카메오로 나와 관객들을 맞는다. 이미 여러 차례 기사화되긴 했으나, 아직 모르는 관객들의 재미를 반감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굳이 적진 않겠다. 존재만으로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다는 것만 귀띔한다.
9일 개봉, 상영시간 107분 17초, 15세 이상 관람가, 코미디/액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