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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전선'에 의한 산불…주민 '트라우마' (계속) |
"꿈속에서도 타는 냄새가 나면 그냥 벌떡벌떡 일어나요."
전선이 끊어지거나 스파크가 튀면서 이어진 산불로 피해를 본 강원 동해안 주민들은 여전히 '트라우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특히 산 인근에서 터를 잡고 사는 주민들은 언제 또 전선이 말썽을 일으킬지 몰라 가슴을 졸이고 있다.
지난 2005년 4월 28일 양양군 현남면 원포리 인근의 한 야산에서 발생한 불로 산림 168ha가 소실되고, 이재민 11가구 32명이 피해를 봤다. 벌써 14년 전 일이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원포리 마을 주민 김영복(여·72)씨는 "불똥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튀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주민들이 다 놀라서 밖으로 나와 불을 끄려고 물을 직접 붓고, 전쟁도 그런 전쟁이 없었다"고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김 할머니는 "이번에 고성과 속초에 이어 강릉에도 산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초와 강릉 사이에 위치한) 양양지역에까지 불이 날까봐 지역 주민들은 한숨도 못 잤다"며 "산불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고 여전히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당시 산불로 집터를 잃었던 주민들은 한목소리로 "불만 나면 공포"라고 혀를 내둘렀다.
산림청과 속초경찰서 등에 따르면 이 산불 원인은 '전선스파크 추정'으로 나왔다. 당시 주민들은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고압선이 끊어진 만큼 한국전력공사의 관리소홀을 지적했지만, 산림청과 경찰 등 합동조사 결과 근거 불충분으로 책임자를 찾지 못하고 내사 종결했다.
당시 산불로 집터를 완전히 잃은 채용석(68)씨는 불이 난 당일 새벽,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한 채 몸만 대피했던 것을 떠올리며 "불이라면 꿈에서 봐도 놀라 눈이 떠질 정도로 노이로제가 심하다"면서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벌렁벌렁 거린다"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어 채 할아버지는 "한전 전신주는 주로 시내가 아니라 산 쪽으로 돌아 설치돼 있어 바로 인근에 사는 주민으로서 늘 걱정되고 겁난다"며 "10년, 20년 살려고 만든 집인데 완전히 잿더미가 된 것을 본 심정이 오죽했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선단락 추정'으로 파악된 이 화재는 산림 356ha를 태웠다. 이재민은 5가구 7명으로 모두 집터가 완전히 불에 탔다.
동해안산불방지센터가 공개한 '강원도 대형산불 발생현황'에 따르면 최근 15년 동안 '전기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산불은 이번 고성·속초 산불까지 포함해 모두 4건이다.
이는 '대형산불'만 정리한 자료로, 작은 산불까지 포함하면 더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책임자 처벌은 아직까지 단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앞서 지난 2005년 4월 28일 양양군 현남면 인근의 한 야산에서 발생한 불은 내사종결 됐고, 그보다 앞서 발생한 2004년 3월 10일 속초시 노학동 청대산 산불은 '고압선 절단에 의한 화재'라는 경찰 수사발표가 있었지만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에 피해 이재민들은 1년 6개월 동안 형사적 책임 공방을 벌이며 항의했고, 지난한 투쟁 끝에 결국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중재로 한전은 피해 주민들에게 위로금 일부를 보전해 주는 방식으로 마무리했다.
한편 지난해 3월 28일 발생한 고성군 간성읍 탑동리 산불은 책임자 2명이 지난해 12월 기소됐지만, 아직 재판 일정도 잡히지 않은 상황이다. 책임자 2명은 개인 사업주와 안전관리 담당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지난달 18일 국과수 감정결과 고압선과 개폐기를 연결하는 리드선 단면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상태로 전신주에 부딪히면서 '아크 불티'가 발생했고, 이 불티가 낙엽 등에 옮겨붙으면서 산불로 번졌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이달 중순쯤 수사를 마무리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져 책임자에 대한 처벌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속초 청대산 산불 당시 2년 가까이 한전에 책임을 촉구했던 주민들은 이번 고성·속초 산불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시 산불로 집터를 잃은 김주호(67)씨는 "당시에도 한전의 과실이 명백했는데 이재민들에게 손해배상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번 산불은 다행히 CCTV 화면 등이 공개된 상황인데도 한전은 이물질을 운운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여전히 똑같구나'하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이맘때(봄철)쯤이면 바람이 많이 부는 만큼 한전은 이를 파악하고 더 적극적이고 철저하게 관리하고 점검했어야 했다"며 "한 번 산불이 발생하고 이재민이 되면 다시 복구하고 재기하는데 10여년 넘게 걸린다"고 성토했다.
현재 김씨는 다시 집을 짓고 농사일도 하는 등 예전 생활을 되찾았지만, 당시 온전한 배상이 이뤄지지 못한 탓에 아직 빚이 다 청산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번 산불 피해 이재민 정동기(62)씨는 "청대산 산불이 어느 정도 잊어버릴 만하니 다시 또 불이 났고, 그 규모는 더 커졌다"며 "한전이 그 당시 교훈을 얻고 안전관리를 제대로 했으면 이번 산불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노했다.
또 다른 이재민 이현주(여. 50)씨는 "산불이 발생하면 주민들도 피해를 보지만, 관리 주체인 한전과 정부 모두 손해 아니냐"며 "앞으로 비슷한 산불이 '또' 발생하지 않으려면 한전은 제품을 정품 사용하고, 안전 점검은 하청 주지 말고 한전에서 철저히 관리하는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