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 성적관계 탐닉하는 의사들, 왜 처벌받지 않나?

정신과 의사의 그루밍 성범죄, 권력형 범죄다

정신과 의사가 자신이 상담하는 환자를 대상으로 그루밍 성폭행 했다는 보도 이후, 상담자가 성인 내담자에게 가하는 그루밍 성범죄를 입증할 법 체계가 구축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신과 의사인 김모씨는 지난해 4월 자신이 진료하는 환자 A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으나 이듬해 1월 김씨에게 그루밍 성범죄를 당했다는 또다른 피해자 B씨의 증언이 나왔다.

하지만 B씨는 김씨를 고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김씨의 불기소 처분을 보고 자신의 피해 또한 입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루밍 성범죄'란 가해자가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 보통 어린이나 청소년을 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행해지는데,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들은 피해 당시에는 자신이 성범죄의 대상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닛부타의 숲' 정신분석클리닉 이승욱 대표는 내담자들이 상담자를 찾을 때 대부분 심리적 미약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들이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진=독자 제공)
▲ 상담자와 내담자간 전이관계에 대해 충분한 이해 필요

이 대표는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특히 상담자와 강한 전이관계에 있는 내담자는 상담자에게 성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상담자는 이를 통제할 수 있도록 엄격하게 훈련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이란 내담자가 상담자에 대해 느끼는 이상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말하며 정상적인 치료 과정에 항상 수반된다. 특히 내담자는 전이 과정 중 상담자에게 극도의 의존성을 보이기도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발행한 한국 상담가의 성윤리의식 실태와 내담자 법적 보호 토론회 보고서(2016년)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1970년 이후 내담자와 상담자의 성적 관계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임상심리학 전공 포러(Forer, B)박사의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성적 관계가 얼마나 일어나는지에 대한 연구(1970년)에 따르면 상담자들 중 17%가 내담자와 성적 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다고 보고됐다.

하지만 성적 관계 이후 내담자가 심각한 정도의 정신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 또한 보고된 바 있다.

캘리포니아 상담 협회(CPA) 임상 및 전문 심리학 부서 회장을 역임했던 보호우토스(Bouhoutsos, J)박사의 상담가와 심리학자 간 성적 접촉과 이후 치료 효과에 대한 연구(1983년)에 따르면 상담자와 성관계를 맺은 내담자의 11%는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의 정신적 피해를 입었으며, 그 중 1%는 자살했다고 한다.

따라서 상담 과정 중 성적인 관계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담자의 충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대표는 "내담자와 성적인 관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담자의 윤리적 덕목만으로는 부족하고 충분한 수련이 꼭 필요하다"면서"하지만 심리 상담을 병행 하는 의사의 경우 윤리 규정을 엄격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하는 훈련 과정이 많은 부분 생략돼 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B 씨가 피의자에게 제공받은 선물(사진=독자 제공)
▲내담자의 그루밍 성범죄를 법적으로 인정할 것인가?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발생하는 성범죄의 경우 강한 전이관계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합의의 과정이 존재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 경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추행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 상황이다.

현재 우리나라 법률상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일어나는 성범죄에는 심리적 위계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추세다.

지난해 11월 정신과의사 김씨의 피감독자간음 혐의에 대해서도 위력이 입증되지 않아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은 바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최란 팀장은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상담자가 가하는 그루밍 성범죄는 개인적 일탈의 문제로 봐선 안되고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권력형 성범죄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담자가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냐는 일각의 물음에 그는 "먼저 피해자가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 할 수 있는 상태인지 봐야 한다"면서 "상담을 받는 내담자의 경우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이며 이때 치료자가 갖게 되는 권한이 엄청나기 때문에 권력형 성범죄가 일어날 위험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승욱 대표 또한 "현재 우리나라도 목사가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 위계에 의한 성폭력으로 인정하기 시작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실에서 상담자와 내담자는 종교계만큼의 강력한 심리적 위계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위력에 의한 성폭행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11월 신도 8명을 4년에 걸쳐 그루밍 성폭행한 목사의 혐의를 인정하고 1심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한 바 있다.

이 대표는 "실제로 미국의 26개 주에서는 환자가 성관계에 동의했더라도 상담자와 성관계를 맺은 경우 상담자의 면허 자격을 박탈 하게 돼 있고 심지어 상담 자격을 갖추지 않은 목사, 교사가 상담을 진행하면서 성관계를 맺은 경우 또한 처벌받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의 성범죄를 막기 위해 상담자를 법적으로 제한 하는 것은 상담자의 근본적인 윤리의식을 고양시키는 방법이 아니고 상담의 자율성을 해칠 수 있어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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