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노동자들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한 채 그저 '일하는 기계' 취급을 받았다. 야근, 잔업, 특근을 밥 먹듯 하는데도 저임금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열악하고 부당한 노동 현실을 공론화하고자 했고, 이는 민주노조 설립의 출발점이 됐다.
민주노조가 활발하게 만들어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파업전야'(감독 이은기·이재구·장동홍·장윤현)는 1990년 3월 28일 개봉했다. 노동절 101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이 작품은 16㎜ 독립영화이자, 장산곶매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대한민국 최초의 노동 영화'로 꼽힌다.
'파업전야'는 기계처럼 일만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담은 영화다. 동성금속 소속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학생 출신 노동 운동가의 위장 취업, 사측의 반발과 노조 핵심 인물 해고, 구사대와의 갈등 등 전형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다.
여전히 노동자의 권익을 주장하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을 돌아보면, '파업전야' 속 노동자-회사의 모습은 2019년 현재와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 인디스페이스에서는 이 전설의 영화 '파업전야'가 상영됐다. 한국 노동운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양규현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가 관객과의 대화 초대 손님으로 나왔다. 강순영 서울노동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사회를 맡았다.
단 전 위원장은 "이런 좋은 영화를 재개봉해서 많은 관객분들이 볼 수 있게 한 노동희망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또 저 같은 사람도 불러서 여러분과 같이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문을 열었다.
단 전 위원장은 극장에서 '파업전야'를 보는 건 처음이라고 밝혔다. 1989년 하반기부터 수배 중이었고,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민주노총의 전신)을 만들고 나서는 1년 6개월 동안 징역 생활을 하느라 볼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단 전 위원장은 "나중에 비디오로 보긴 했는데 사실 영상(영화)으로 본 건 30년 만에 처음이다. 상당히 감회가 새롭다. 어떤 영화보다도 그 시대적 배경과 그때 노동자의 상태, 노동자의 심리적 묘사라든가 노동자 문화라든가 이런 것이 너무나 잘 녹아서 만들어진 참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노협 마지막 위원장을 맡았던 양 대표는 "대학 강당을 빌려서 각 지역에서 상영했는데 (그땐) 지금 화질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 영화 보러 노동자들 데려갔을 땐 목적이 있다. 민주노조 조직화를 위해서였다. 활동에 조금 관심이 있는 동지들과 가면 (웬만한) 교육하는 것보다 ('파업전야' 보는 게) 낫다"고 전했다.
이날 영화를 본 관객 대부분이 영화 개봉 때, 혹은 전노협 설립 당시 태어나지 않았기에 전노협이 무엇인지, 민주노총으로 가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도 나왔다.
단 전 위원장은 "1987년 이전 시대는 야만의 시대였다. 왜냐하면 노동의 가치, 노동자의 인권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은 생산을 위한 수단이고, 노동자는 생산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라며 "엄청난 불만이 있었고 그게 87년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전국적인 투쟁으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손으로 만든 정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를 만드는 게 87년 노동자들의 숙원이었다"면서 "1990년 1월 22일날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우리 조직('전노협')을 만들게 된다"고 전했다.
양 대표는 "옆에 계신 분(단병호)은 전노협을 만든 분이고 저는 문 닫은 사람이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전노협은 건설에서 해산까지 6년 동안 3천 명 구속, 5천 명 해고됐다. 전 세계적으로 기록에 남을 만한 일"이라고 한 그는, 이후 제조업뿐 아니라 사무직, 공공 부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노조가 만들어져 큰 틀거리에서 조직 재편이 필요했고 그 결과로 민주노총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자신을 대학생이라고 밝힌 한 여성 관객은 노동자들이 단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양 대표는 "민주노조 운동의 발전은 학생운동과 분리할 수 없다. 현장에 들어와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한 것이 민주노조 운동을 탄탄하게 다진 계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노동 현장도 마찬가지지만 운동에서 '학습모임'은 필연적이라고 본다"고 답했다.
대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 관객은 같은 노동자들도 정규직/비정규직에 따라 계급지어지고, 교육 현장에서부터 사무직/현장직을 차별하는 발언이 쉽게 나오는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조언을 구했다.
이에 단 전 위원장은 "영화 보고 나서 소감 간단하게 주고받을 줄 알았더니만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이게 간단치가 않은 것 같다"고 말해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단 전 위원장은 "우리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한다. 자본이 자본을 수탈하지 않으면 유지하기 어려운 사회다. 자본도 그냥 수평적인 자본이 아니다. 독점적으로 내려온 자본이 다른 자본을 수탈해 경제적 구조가 유지되는 사회다. 모든 게 다 여기서부터 파생되고 있기에, 여기에 대한 진단과 우리의 인식이 있어야 바꿔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동자 개개인의 힘이 아주 하찮은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여서 만드는 거다. 세상의 이 모든 변화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의 결과다. 그만큼 한 개인이 어떤 판단,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바뀔 수 있다"고 전했다.
"항상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고 노동자의 머리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고, 노동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려고 하는 것. 이런 자세를 가져가는 게 그래도 조금 더 나은 미래에서 사는 길로 갈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편, '파업전야'는 개봉 29년 만에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다시 관객들을 찾는다. 제129회 노동절인 오늘(1일) 재개봉해 전국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