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식 MBC PD '1인 시위' 이후…더 많은 '김PD'를 기다리며

[뒤끝작렬] 드라마 현장 '갑' 지상파 드라마 PD가 외친 '을' 방송 스태프 노동인권
방송 스태프들이 원하는 것…일한 만큼 받고 최소한의 시간만큼 쉬자는 것
법과 제도에 앞서 '관행'이란 해묵은 과제부터 타파해야 해
MBC 한가운데서 홀로 "김장겸은 물러나라!" 외쳤던 김민식 PD
제2, 3의 '김민식 PD'가 나타나야 할 때

김민식 MBC 드라마 PD가 26일 정오부터 서울 마포구 상암산로 CJ ENM E&M센터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사진=최영주 기자)
하나의 프로그램 뒤에는, 한 편의 드라마 속에는 과도한 노동시간과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자로서 제대로 된 권리조차 행사하지 못하는 수많은 방송 스태프가 존재한다. 늘 카메라 뒤에 서서 부당함을 견뎌 온 이들을 위해 조금은 이상하게 비칠 수 있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김민식 MBC 드라마 PD가 1인 시위에 나섰다. 드라마 제작환경을 개선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인 방송 스태프의 권리를 보호하라고 외치기 위해서 드라마 제작 현장의 최상위에 위치한, 이른바 '갑'의 영역에 있는 지상파 방송사 PD가 나선 것이다.

'뉴 논스톱' '내조의 여왕' 등을 연출한 김민식 PD가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상암산로 CJ ENM E&M센터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지상파 방송사 PD, 그것도 드라마 PD가 타사 앞에서 'CJ ENM은 2년 전 약속한 재발방지대책 신속히 이행하라' '지상파 3사도 약속했다! CJ ENM도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에 지상파 3사 수준으로 적극적으로 나서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이처럼 희귀하다면 희귀할 수 있는,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이 펼쳐진 이유에 대해 김 PD는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이른바 '갑'이라 할 수 있는 최상위에 위치한 존재는 방송사다. 방송사와 그 방송사에 소속된 정규직 드라마 PD는 '을'인 방송 스태프들에게 '갑'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갑의 위치에 속한 사람 중 하나인 김민식 PD가 1인 시위에 나서 드라마 제작 환경의 개선을 요구한 것은 드문 광경이다.

김 PD가 "처음 1인 시위 제안이 왔을 때는 나는 현업 PD이고 언급되는 드라마에 아는 배우와 작가가 있어서, 마치 내가 드라마에 대한 비난을 하는 것 같아서 어렵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듯이 자칫 가해가자 가해자를 비난하는 듯한 상황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 PD가 1인 시위에 나선 것은 "다시 생각해보니 드라마 제작 관행에 대한 이야기이고, 저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 PD가 말한 '잘못된 것' '바뀌어야 하는 관행'이란 최소 임금과 최소 수면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을 뜻한다.

김 PD는 "드라마 촬영 현장을 바꿔야 한다. 안 그러면 너무 힘들다. 이 문제는 어느 방송사인가 하는 걸 떠나서 잘못된 문제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라며 "드라마 제작 관행과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10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해외촬영 연속 151시간, 턴키계약 관행 여전' 스튜디오드래곤 제작 아스달연대기 고발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문화체육관광부(당시 장관 도종환)와 한국콘텐츠진흥원(원장 김영준)이 방송영상콘텐츠 제작역량 강화 및 제작인력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동환경 전반을 시범 분석한 '2018 방송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방송 스태프의 노동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비정규직(계약직·시간제·프리랜서) 형태로 제작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는데, 특히 드라마 연출 스태프는 100% 비정규직으로 조사됐다. 또한 전체 직종 가운데 일주일 평균 노동시간이 가장 긴 상위 3개 직종은 드라마 연출(89.0시간), 드라마 기술 스태프(87.8시간)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평균 노동시간도 드라마 기술 스태프(17.9시간)와 드라마 연출직(16.0시간)으로 가장 길었다.

이처럼 빠듯한 스케줄 속에 과노동이 이어지고 제대로 된 안전장치조차 부족한 현장에서 과로와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현장의 재촉에 제대로 안전을 챙기지 못하고 촬영하던 도중 한 조명 스태프가 고압선에 감전되며 발가락을 잃거나, 잠이 든 한 코디네이터는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지인들이 말렸음에도 해가 다 진 상태에서 40분간 카누 운행을 강행하는가 하면, 무리한 촬영으로 인해 한 스태프는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방송 스태프들이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일한 만큼 받고 최소한의 시간만큼은 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이지만, 이 '최소한'조차 지켜지지 못하는 것이 드라마 제작 현장이다.

그나마 '노동자성'이란 것도 지난 2017년에서야 인정받았다. 그렇게 노동자성을 인정받으며 법적 테두리 안으로 들어왔지만, 법이 있음에도 '관행'이란 이름으로 굳어진 부당함은 '꿈'과 '열정'으로 포장된 채 여전히 방송 스태프들을 구석으로 내몰고 있다.

방송제작 환경 개선은 방송 스태프들만이 뭉쳐서 목소리를 낸다고 바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 있고 명확하게 갑과 을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법이 있어도 을을 위해 지켜지지 않는 때가 더 많다.

명문화된 법이 아닌 실질적인 현장에서도 방송 스태프가 '노동자'로 대우받고, 이들에 대한 법과 제도가 정착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묵은 '관행'을 깨는 일이다. 그 관행을 깨나가는 시작은 방송 스태프를 바라보는 인식의 개선이다. 을의 반대편에 선, 보다 많은 권한과 책임과 실행할 수 있는 의지를 지닌 이들의 동참과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김민식 MBC 드라마 PD가 지난 2017년 6월 2일 MBC 사내에서 '김장겸은 물러나라'를 외치며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사진=페이스북 화면 캡처)
물론 김민식 PD가 1인 시위를 했다고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이 급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상파 드라마 PD가 드라마 제작 관행을 바꾸자고 외치더라도 그것이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방송제작 현장의 '갑'이라 할 수 있는 지상파 방송사 PD가 타회사인 CJ ENM 앞에서 "방송 스태프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방송 스태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당장의 변화는 없을지라도 나를 위해 누군가가, 그것도 방송 현장에서 늘 마주치는, 가장 큰 권력을 쥔 PD가 행동에 나선 모습은 방송 스태프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를 위해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서 위로해 준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김 PD는 "나의 현장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엄혹한 시절, 말 한마디조차 쉬이 꺼내기 힘들었던 때인 지난 2017년 6월 2일 박근혜 정권하의 MBC 한가운데서 "김장겸은 물러나라"라고 외쳤던 사람이 김민식 PD다. 당시 김 PD의 뒤를 이어 "김장겸은 물러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올까 걱정도 됐다. 그만큼 내부는 10년 가까이 된 투쟁과 실패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일 어렵고 힘든 '처음'이라는 고비를 김민식 PD가 웃으며 넘어섰다. 그 용기를 보고 하나둘 "김장겸은 물러나라"를 외치며 MBC 로비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김장겸 전 사장은 물러났다.

그때처럼 가장 힘들고 고민스러운 '처음'을 김민식 PD가 넘어섰다. 자기의 동료를 부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뿐이라며 말이다. 이제 김민식 PD를 이어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라 외치며 하나둘 모여들 PD들을 기다려보게 된다. 그날, 그때 MBC 로비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방송 스태프에게 단순히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은 더 나아질 테니 견뎌보자"는 위안을 전할 수는 없다. 잘못은 누구에게나 잘못이고, 어디서나 잘못이다. 부당함은 누구에게나 부당하다. 부당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곳이나 사람은 없다. 내 자신이 부당함을 겪었고, 부당함을 겪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 안다면, 부당함에 맞서는 상황에서 나를 위해 나서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의 힘을 안다면, 그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김민식 PD는 적어도 먼저 나서라 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시작은 김 PD가 끊었다. 지금은 김 PD만이 앞에 나서서 '나의 현장'만큼은 달라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제2, 3의 김 PD가 나와서, 혹은 현장에서 "나의 현장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현장'이 하나둘 늘어날 수 있다면 방송 스태프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기에 더 많은 '김민식 PD'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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