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재판 전, 임종헌과 외교부 차관 수차례 만났다

외교부 차관과 학연 있는 실무자 대동해 지속적 접촉
외교부 의견서 제출 않자 직접 찾아가 "얼른 내시라" 독촉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1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사법 농단' 관련 2회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사진=황진환 기자)
"법원행정처가 너무 오만했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3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이번 사법농단 사태에 대해 소회를 밝혔다. 이 전 기조실장은 2013년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 재상고심을 맡았을 때, 법원행정처가 외교부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줬다는 혐의에 개입된 인물이다.

이날 그가 법정에서 풀어놓은 증언은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 기재된 것보다 훨씬 생생하고 구체적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공정해야 할 사법부는 어쩌다 '나서서' 정부의 입장을 들어주려 애쓰게 됐을까. 지난 23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약 2시간가량 진행된 이 전 기조실장의 증인신문 중 주요 대목을 풀어본다.(맥락 전달을 위해 질문 순서는 약간 수정했다.)

배경상황: 2013년 8~9월 대법원에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패소'에 불복하는 상고장이 접수됐다. 당해 2월 출범한 박근혜 정부의 외교부는 외교적·국제법적 문제점 등을 들어 재상고심이 '신중하게' 처리돼야 한다는 입장을 사법부에 피력했다. 이에 (사건 당사자가 아닌) 정부에도 의견개진 기회를 달라 요청했다. 대법원은 2015년 1월 28일 민사소송규칙 제134조 개정을 통해 '국가기관 등 참고인 의견서 제출제도'를 도입했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이 정부의 요구를 직접 들어 규칙 개정을 주도했고 이후 외교부의 의견서를 받아 재상고심 '시나리오'를 짰다고 보고 있다.

◇검사: 증인이 2015년 8월 기조실장으로 부임한 후, 피고인(임종헌)과 조태열 전 외교부 제2차관, 김인철 외교부 국제법률국 국장을 만난 사실이 있나요?

◆증인: 네

◇검사: 장소는 어디인가요?

◆증인: 시내 무슨 호텔에서 점심 같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검사: 피고인은 증인이 조 전 차관의 고등학교·대학교 후배인 것을 알고 있었나요?

◆증인: 네 (피고인이) 먼저 얘기했습니다. 임 전 차장이 '조 전 차관과 약속이 돼 있는데, 제 선배이니 같이 가자'고 해서 가게 됐습니다.


◇검사: 조 전 차관을 만난 자리에서 외교부의 (강제징용 사건) 의견서 제출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증인: 제가 기억하기론 임 전 차장이 외교부에서 강제징용 사건 관련해 의견을 내고 싶다고 해서 대법원 규칙을 변경했는데 외교부에서 아직 의견서를 안내서 기다리고 있다는 취지로 얘기했습니다. 무슨 자리인지 모르고 가면서 (피고인의) 얘기를 들었고, 그 자리에서 조 전 차관이 외교부 의견서 제출 문제를 얘기했습니다. 초안을 언급하면서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준비되면 김 국장을 통해 저한테 얘기 하겠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검사: 그때 피고인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증인: 그냥 뭐 한번 봐주겠다고 얘기한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의견서까지 봐드릴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니 업무 협조 차원인가 했습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봐주기까지 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습니다.

◇검사: (피고인이) 거절이나 난색을 표하진 않았습니까?

◆증인: 그러진 않았습니다.

◇검사: 증인은 피고인과 조 전 차장이 이미 여러차례 만난 인상을 받았다고 진술했는데 맞습니까?(검찰은 이 전 기조실장이 부임하기 전인 2015년 6월에도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지난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증인: 네. 그 전에 만난 걸로 알고있습니다. 대화 내용도 그랬고 피고인도 그렇게 얘기하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

4명의 회동 이후 이 전 기조실장은 김 국장이 서초동으로 직접 찾아와 외교부의 입장문 초안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분량은 A4용지 2페이지였고 문서를 서류봉투에 담아 스테이플러로 찍은 것을 받았다고 했다. 한 부는 자신이 갖고, 한 부는 임 전 차장에게 줬다고 밝혔다. 검찰은 법원행정처 내에서 이 문서를 '(재상고) 재판부가 고려할만한 모양새'로 수정해줬다고 보고 있다.

이 네 명은 2016년 9월에 한차례 더 만났다. 이 전 기조실장은 점심 무렵 외교부 근처로 기억했다. 그때는 임 전 차장이 조 전 차관에게 서류봉투를 건넸다. 외교부가 전달했던 초안에 어떤 내용을 추가했는지 묻는 질문에 이 전 기조실장은 "저는 한번 읽어보고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어 "임 전 차장이 어떻게 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며 "다만 (외교부에) 전달 하셨으니 뭐라도 쓰지 않았을까 정도로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이 외에도 이 전 기조실장이 털어놓은 사법부의 재판 관련 '서비스'는 상당히 친절한 수준이었다. 외교부를 위해 참고인이 재판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는 제도까지 만들었는데 회신이 없자, 직접 찾아가 얼른 의견서를 내라고 알려준 것이다.

◇검사: 2016년 조 전 차장이 UN대표부 대사로 내정된 상황에서 다시 만났는데, 이유가 뭐였습니까?

◆증인: 외교부에서 의견서를 제출한다고 해서 대법원 규칙도 바꿨는데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외교부 자체가 특유의 신중함이 있기 때문에 위안부 합의 등에 대해 국민적 여론이 좋지 않아서 그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임기간이 1년 남았었기 때문에…. 솔직히 의견서를 촉구 내지 독촉하러 간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임 전 차장이 조 차관에게 '의견서를 이제는 제출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지 않으면 (양승태) 임기 중 처리하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주로 했다.

이 전 기조실장의 증인신문 다음날인 24일에는 외교부가 입장문을 제출한 후 이를 반영한 행정처 내부 보고서를 쓴 당사자들이 증인으로 나왔다. 박찬익·김종복 전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임 전 차장으로부터 해당 지시를 받았으나 그 사유가 부정한 목적인 것인지는 애매하다는 투로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임 전 차장이 이들에게 검토하라고 지시한 내용은 '강제징용 사건에서 개인 청구권의 소멸시효'나 재상고 재판의 전원합의체 회부에 대한 시나리오였다. 증인으로 나온 판사들은 이것이 단지 모든 상황을 다양하게 알기 위해 기재한 정도라고 일축했다.

사전에서 '사법행정'은 다른 행정관서와 마찬가지의 행정작용이면서도 삼권분립주의와 사법권 독립의 원칙에 따른다고 정의돼 있다. 유럽과 달리 사법행정권이 제3의 독립기구가 아닌 사법부 내에 있는 한국의 경우는 더욱 '행정'이 아닌 '사법'에 무게가 기울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임종헌 전 차장은 지난달 첫 공판 때부터 지속적으로 "사법행정은 사법부의 '재판작용'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행정기관으로서 외교부에 대한 '협조'와 '소통'했을 뿐, 부정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강제징용 부분에서는 임 전차장이 '전원합의체 회부'나 '소멸시효' 등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검토를 지시했는지가 유무죄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임 전 차장이 말한 것처럼 이 모든 협조들이 '적법한' 사법행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번 재판부의 판단을 넘어 학계 등 사회적 토론 과정에서 다시 살펴보고 합의해야 할 부분일 수 있다.

다만, 이 전 기조실장은 증인신문을 마치며 "외교부와 비공식적으로라도 의견을 나눴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잘못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을 열심히 한다는 명목으로 행정처가 타성에 젖어 있었다"는 뼈아픈 반성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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