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정권 검열에 '잡아가라'는 심정으로 앨범 냈더니.."

'시대의 음유시인' 정태춘, 올해 데뷔 41년 맞아
시골에서 나고 자란 감수성, 독특한 포크로 발현
1집 발매했던 78년, 정부 검열 심해 가사도 바꿔
잡아가려거든 잡아가라는 심정으로 낸 '아, 대한민국'
가요 사전 심의제도 위헌심판 제소, 결국 없어져
고통 받는 노동자들 집회 현장에서 연대공연 이어가
올해 정태춘-박은옥 40주년 기념하는 다양한 기획 진행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 1 (18:15~19:55)
■ 방송일 : 2019년 4월 19일 (금요일)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정태춘 (가수)


◇ 정관용> 우리 시대 음유시인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 가수 정태춘 씨 올해가 데뷔 40주년이에요. 그래서 기념행사, 콘서트, 새 앨범까지. 그동안 기다려준 팬들을 위해서 지금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그래서 저희도 한번 초대했습니다. 가수 정태춘 씨 어서 오세요.

◆ 정태춘> 안녕하세요.


◇ 정관용> 벌써 40년이네요. 아니, 정확히는 41년이죠.

◆ 정태춘> 저는 그렇고요. 박은옥 씨가 40년.

◇ 정관용> 그러니까 시인의 마을이 1집이죠, 1집 앨범. 그게 78년. 1집 앨범에 촛불도 있었고 그 1집 앨범이 그렇게 메가히트를 치는 경우들이 있나요?

◆ 정태춘> 더러 있죠. 오히려 1집에서 그렇게 히트를 하고 그다음에 좀 떨어지는 것이 그런 예가 많죠. 저도 그랬고.

◇ 정관용> 어쩌다가 가수가 되셨어요? 원래 어려서부터 꿈이 가수였습니까?

◆ 정태춘> 아니요. 기타를 어려서부터 잡기는 했는데 그러다 중고등학교 때 바이올린을 했고. 아마 정상적으로 갔다면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니고 음악 선생님으로 가지 않았을까 또는 연주자가 됐거나 그런데 재수를 하면서 바이올린을 접고 기타를 다시 잡으면서 곡들이 나오기 시작을 하고요.

◇ 정관용> 곡이 그냥 나와요?

◆ 정태춘> 네.

◇ 정관용> 작곡을 배운 것도 없는데?

◆ 정태춘> 그렇죠. 바이올린을 한 정도의 음악 정도. 그냥 나오죠.

◇ 정관용> 그냥 나와요? 누구나 그냥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 정태춘> 물론 각자 타고난 재능은 서로 다르니까. 그래서 곡들이 나왔는데. 누가 좀 불러줬으면 좋겠다 그런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죠.

◇ 정관용> 직접 노래를 부르실 생각도 안 하고.

◆ 정태춘> 기타도 잘 못 치고 그랬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서유석 씨도 조금 불러보겠다고 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또 안 됐고.

◇ 정관용> 그때 서유석 씨한테 가져간 곡이 시인의 마을 이런 거였어요?

◆ 정태춘> 아니요. 그건 그전의 노래였습니다. 그분이 보셨던 건. 그리고 양병집 씨도 그분은 몇 곡을 녹음했었어요.

◇ 정관용> 녹음까지?

◆ 정태춘> 그랬는데 또 그분이 그 노래들을 가지고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었고. 그러다 보니까 레코드 회사에서 네가 할래 이렇게 된 거죠.

◇ 정관용> 직접 부를래?

◆ 정태춘> 그래서 이제 조금씩 노래도 해 보고.

◇ 정관용> 그러니까 그전에 기타 치고 바이올린은 했지만 노래는 불러본 적 없는 거 아니에요?

◆ 정태춘> 조금씩은 했었습니다, 노래도. 그런데 개성 있는 가수로 등장을 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태였죠.

◇ 정관용> 역부족이라고 하는 게 그러니까 정태춘 씨와 같은 조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이 그 당시 그 이전에는 없었죠. 시를 읊듯이 노래를 부르는.

◆ 정태춘> 가사나 이런 음악 형식으로 본다면 그랬죠. 그런데 가수로서는 잘 뛰어난 어떤 가창력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고.

◇ 정관용> 그러니까 기존 고정관념에서 보면 가수가 아닌 거죠. 그런데 새로운 어떤 장르, 영역을 만들어내신 거 아니겠습니까?

◆ 정태춘> 그런 것까지는 아니고요. 그 전에 이미 이제 포크 쪽에 훌륭한 선배들이 많이 계셨죠. 김민기 씨라든지 서유석 씨, 양병집 씨도 그렇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서.

◇ 정관용> 조동진 씨도 있었고.

◆ 정태춘> 조동진 씨도 계셨고. 그래서 조동진 씨는 연배는 저희보다 한참 위지만 발표한 건 조금 늦으셔서 그 뒤에 이제 알게 됐고 그래서 그 선배들의 영향을 또 지대하게 받았죠.

◇ 정관용> 그러면서도 또 정태춘 씨만의 독특함이 있잖아요.

◆ 정태춘> 그게.

◇ 정관용> 이른바 정통 포크와 조금 다른.

◆ 정태춘> 그게 이제 촌사람이라는 거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 정관용> 고향이 어디세요?

◆ 정태춘> 경기도 평택입니다. 그리고 팝송을 별로 안 불렀다는 거. 그런 것으로 다른 노래가 가능하지 않았나. 거기에 약간의 클래식의 영향, 바이올린이라든지 내가 어려서 들었던 클래식들. 이런 영향들이 있어서 조금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 정관용> 노랫말하고 작곡하고 전부 다 직접 하시죠?

◆ 정태춘> 네.

◇ 정관용> 노랫말이 먼저 나옵니까? 곡이 먼저 나옵니까?

◆ 정태춘> 대체로 저는 같이 작업을 해요. 한쪽에는 가사가 나가는 백지가 하나가 있고 한쪽에는 오선지가 하나가 있고. 그래서 같이 작업을 해야 노래는 어떤 틀이 있거든요. 그 틀에 맞춰야 되기 때문에 1절을 그렇게 쭉 해서 한 틀을 완성을 하고. 그다음에는 이제 거기에 맞춰서 2절, 3절 이렇게.

◇ 정관용> 그건 가사만 하면 되니까.

◆ 정태춘> 그렇죠.

◇ 정관용> 동시진행이 되는군요, 그게.

◆ 정태춘> 동시진행이 돼야 더 뭐라고 할까. 더 낫다고 생각을 해요.

◇ 정관용> 음률과 가사 물론 같이 맞아야죠. 조화가 돼야 되니까.

◆ 정태춘> 그렇습니다. 음률이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음률의 변화하고 가사의 변화하고도 아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거든요.

◇ 정관용> 그런데 또 다른 분들은 보면 작사, 작곡자가 다른 경우도 많잖아요. 그런 경우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 정태춘> 옛날에는 작사가 먼저 있고 그게 작곡가들이 친한 작사가들한테 가사 좀 줘 이렇게 했어요. 그래 가지고 가사를 받은 다음에 작곡을 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근래에 듣기로는 거꾸로라고 얘기를 합니다. 음악을 먼저 다 만들어놓고 그 음악을 작사가들한테 줘서 거기에 맞는 가사를 담는다고 합니다.

◇ 정관용> 초창기에 빅히트를 치고 몇 년은 정말 정신없이 바쁘셨죠?

◆ 정태춘> 그런 셈이었죠.

◇ 정관용> TV출연도 그때는 많이 하셨고.

◆ 정태춘> 많이까지는 아니고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 정관용> 돈도 꽤 버셨고?

◆ 정태춘> 그렇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런데 결혼할 때 지금으로 얘기하면 아파트 한 채를 살 만한 돈이었으니까.

◇ 정관용> 박은옥 씨하고는 언제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 정태춘> 제가 녹음을 끝내고 그리고 녹음이 다 끝났을 무렵 즈음에.

◇ 정관용> 1집 녹음 끝났을 때?

◆ 정태춘> 그리고 앨범들이 조금 풀리고 알려지기 시작할 때쯤 박은옥 씨가 부산에서 최백호 씨의 소개로 우리 회사에 왔고 최백호 씨하고 같은 회사에 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연결돼서 소개받고 그리고 노래 들어보고 그다음에 내 악보들 다 이렇게 보여주고 이렇게 진행이 됐죠.

◇ 정관용> 그게 그러니까 79년?

◆ 정태춘> 78년.

◇ 정관용> 그리고서 언제 결혼하셨죠?

◆ 정태춘> 80년에 했죠.

가수 박은옥, 정태춘 (사진=정태춘 공식홈페이지 제공)

◇ 정관용> 불꽃이 언제부터 튀겼습니까?

◆ 정태춘> 우리 만나면서 바로 연애했어요.

◇ 정관용> 그래요?

◆ 정태춘> 이게 연애다 하는 느낌, 그런 감정 만나서 바로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 정관용> 두 분 다 첫눈에 반하신 거군요, 그러니까.

◆ 정태춘> 집사람은 크게 동의는 안 하는데.

◇ 정관용> 어쨌든 본인의 40주년이라면 작년에 했어야 되는데 부인과 함께하기 위해서 부인의 데뷔년도인 올해 40주년.

◆ 정태춘> 제 30주년 때에 이제 기념공연, 기념 프로그램들을 준비를 했는데 제가 다 사양을 했습니다.

◇ 정관용> 2008년에?

◆ 정태춘> 네. 나 별로 생각 없다. 그랬는데 깜짝파티를 열어주더라고요. 어떤 공연에 가야 된다고 해서 나를 데리고 가더니 깜짝파티장에 들어갔는데 내가 아는 지인들이 60~70명이 쭉 있다가 불이 확 켜지면서 그야말로 박수가 터지고. 그래서 내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내 장례식에 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그랬는데 그래도 꽤 감동을 했죠. 좋은 분들이 다 모여주셔서. 그래서 그냥 제 30주년은 넘어갔어요. 그런데 그다음 해가 박은옥 30주년 이렇게 돼서 다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것조차 내가 하지 말자고 할 수는 없었죠. 그래서 박은옥 30주년인데 같이 공연을 하면서 늘 하듯이 정태춘, 박은옥 이렇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 정관용> 올해도 마찬가지?

◆ 정태춘> 올해도 그로부터 10년이니까 이건 이제 받아서 잘 풀어보자 그 생각을 했죠.

◇ 정관용> 올해도 그러면 가까운 60~70여 명 분들이 추진위원회가 된 겁니까?

◆ 정태춘> 올해는 그분들보다는 저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방면 분들에게 글을 써서 책을 한 권 낸 게 있는데 거기에 한 50여 분의 글이 들어가서 그분들 그다음에는 미술 쪽에서 4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전시를 하자 그래서 거기에 참여하는 미술인 작가들 한 50여 분. 그분들이 이제 중심이 되고 거기에 또 지인들이 좀 같이 참여를 하시고 그래서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그리고 실무진행을 하는 것은 사업단이라고 또 별도의 실무단이 있어서 진행을 하죠.

◇ 정관용> 그래서 올해 40주년을 맞아서 책도 나오고 책도 한 권이 아니라면서요.

◆ 정태춘> 조금 전에 말씀드린 오십여 분의 그 책이 트리뷰트책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 정관용> 헌정책.

◆ 정태춘> 그다음에는 제가 십몇 년 전에 냈던 시집 그리고 바로 절판돼서 없어졌던 시집을 다시 복간을 해서 노독일처라는 시집이 나오고.

◇ 정관용> 노독일처. 무슨 뜻입니까, 그게?

◆ 정태춘> 정확한 뜻은 잘 모르는데요. 중국 쪽에서 나온 말 같은데. 늙고 외로울 때 갈 수 있는 어느 한 곳.

◇ 정관용> 장소.

◆ 정태춘> 이런 정도가 아닌가. 그래서 그 뒤에 썼던 또 한 권 분량이 슬픈 런치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두 권의 시집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제까지의 노래가사들을 모두 묶어보자. 그래서 가사집 정도로 생각을 했는데 거기에 이제 가사만 가지고는 너무 딱딱하니까 내가 좀 해설이라도 붙이겠다. 이래가지고 산문을 조금 붙이기 시작했는데 그게 에세이 같은 느낌. 그래서 노래 에세이 약간의 회고록 같은 분위기도 좀 있고. 그래서 그런 책이.

◇ 정관용> 몇 권 책이 나오고?

◆ 정태춘> 평론집 별도로 누가 또 개인평론집 준비하는 게 있고. 그다음에 2개의 학회에서 학회 프로그램으로 특집으로 다뤄서 아마 그쪽에서도.

◇ 정관용> 대중음악학회 이런 데서.

◆ 정태춘> 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아마 책으로 나오고 할 거고.

◇ 정관용> 시대나 정태춘의 노래에 대한 학문적 분석 이런 거겠군요. 전시회도 또 있죠?

◆ 정태춘> 전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50여 분의 미술가들. 그리고 한쪽 공간을 제가 할애 받아서 제가 지난 한 10여 년 동안 열심히 했던 붓글 30여 점이 지금 걸려 있습니다.

◇ 정관용> 보통 서화전 그러는데 그걸 붓글이라고 표현하시는군요.

◆ 정태춘> 서예가 있고 보통. 그다음에 근래에는 캘리그라피가 있고 한데. 저는 그 어떤 것도 아니고 붓으로 쓴 문장이죠. 작은 문장들 또는 한시 이래서 붓글씨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고 달리 말이 없으니까 붓으로 쓴 글 그래 가지고 저는 그냥 붓글이라고 부르고. 그다음에는 이제 지금 어디 신문에서 그 글들을 연재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 그 코너 이름을 붓으로 쓰는 노래 이렇게 해가지고 어떤 노래의 연장선상에서 나의 이야기를 지금 그릇만 바꿔서 내놓고 있는 그런 중이죠.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전 '다시, 건너간다'에서 시민들이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 정관용> 그러니까 가수이시면서 시인이시면서 붓글 작가이시면서. 그 모든 걸 올해 아무튼 여러 가지 형식으로 보여준다? 공연은 이미 시작했죠?

◆ 정태춘> 제주에서 지난주에 2회 이틀 동안 공연을 하고 왔고요. 그리고 4월 30일부터 서울 그다음 주는.

◇ 정관용> 서울 어디에서 합니까?

◆ 정태춘>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7일간 하고요. 그다음에 부산 주말마다.

◇ 정관용> 전국투어.

◆ 정태춘> 전국투어 들어간 셈이죠.

◇ 정관용> 정태춘 씨 모셔놓고 무슨 얘기만 하냐고 원성이 자자해서 데뷔곡 시인의 마을 듣겠습니다.

◇ 정관용> 수진님께서 정태춘 님 요즘 뵐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2016번 참 좋아하는 정태춘 님 지금 이 시간이 행복해요. 3114번님 진정 정태춘 당신은 신이 내린 목소리를 가진 가수입니다. 노래에서 인생을 배우게 되네요. 노래가 마음을 움직입니다. 문자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78년 제1집에 수록됐던 시인의 마을. 지금 이것도 검열을 당해서 난도질당한 결과물이라면서요?

◆ 정태춘> 한 3분의 1 정도는 원래 가사가 아니죠.

◇ 정관용> 그래요?

◆ 정태춘> 그래서 지금 이런 가사가 있었구나. 이런 느낌으로 들었습니다.

◇ 정관용> 대표적인 게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 그러는데.

◆ 정태춘> 본래는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였고 많은 부분들도.

◇ 정관용>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가 뭐 어때서 그걸 바꾸라고 그런답니까?

◆ 정태춘> 그런데 그 당시에 정부의 문화적인 어떤 그런 관점은 건전해야 된다는 겁니다.

◇ 정관용> 고독해서도 안 되고 방황해서도 안 되고?

◆ 정태춘> 건전한 사고. 그래서 그렇게 많이 바뀌었죠.

◇ 정관용> 첫 앨범의 타이틀곡마저 그렇게 난도질당할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 정태춘> 저는 사실 그때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 정관용> 관심이 없다?

◆ 정태춘> 내 노래가 정부에서 검열을 하는 것도 뭔가 현실감이 없고 또 내가 가수로 지금 진입하고 있다는 것도 별로 현실감이 없고. 나는 그냥 군대에서 갓 제대해서 서울에서 이렇게 좀 아직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그런 시골 청년이었죠. 그래서 노래가 이렇게 된 것도 그래요?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레코드 회사에서 사장님이 다 고쳤죠.

◇ 정관용> 직접 고치신 게 아니고.

◆ 정태춘> 그래서 그 사장님이 또 원래 출판사 쪽에 출판사를 하시던 분이어서 이런 쪽에 소양이 조금 있으셨고.

◇ 정관용> 어쨌든 고쳐놓으니까 하기야 부르죠 이렇게 된 거예요, 그때는?

◆ 정태춘> 별 생각이 없었죠. 그런데 2집을 내면서부터는 제가 선곡을 제 노래 중에서 선곡을 해서 앨범을 짤 때부터는 조금 달랐죠. 내가 이제 가수가 된 것 같아, 그런데 내가 어떤 노래를 부르지? 그런데 또 심의를 넣으니까 또 걸렸네. 이렇게 고쳐라, 저렇게 고쳐라. 그러면서 78년 그 이후에 80년 이때부터 심의당국하고 갈등이 생기고.

◇ 정관용> 그 갈등이 아예 그냥 심의를 아예 받지도 않고 그냥 판을 막 돌리셨죠? 아, 대한민국인가요.

◆ 정태춘> 아, 대한민국 앨범을 기자회견을 통해서 심의가 통과가 안 됐다. 10곡 중에서 9곡이 통과가 안 됐다. 그런데 나는 그냥 내겠다. 그러니 법적조치를 해라.

◇ 정관용> 잡아가려거든 잡아가라. 그게 몇 년도였습니까?

◆ 정태춘> 그게 90년. 그리고 출시를 했는데 물론 레코드 가게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건 이제 불법테이프니까. 그래서 이제 내놓고 많이 팔렸죠. 운동진영 또 어떤 운동조직들 도매로 떼가기도 하고 그랬으니까.

가수 정태춘 (사진=시사자키 유튜브 캡쳐)

◇ 정관용> 안 잡아갔어요?

◆ 정태춘> 전혀 아무런 조치도.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한 3년이 지나갔죠. 그래서 그다음 앨범을 다시 내야 되는데 다시 검열을 받을 수는 없고. 그래서 또다시.

◇ 정관용> 또 그냥 냈어요?

◆ 정태춘> 기자회견을 하고 나 이거 불법으로 냅니다. 그렇게 했더니 바로 기소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전국 경찰에 수거 지시가 내려가고.

◇ 정관용> 그래서 그 재판과정에 위헌 소송심판 신청을 하셨고 결국?

◆ 정태춘> 위헌 판정이 나기 전에 국회에서 관련법을 개정을 했죠.

◇ 정관용> 우리나라의 가요 사전 심의 제도 자체를 없애신 분 아닙니까?

◆ 정태춘> 그렇고요. 그 심의를 하던 기구가 있었는데 공연윤리위원회, 예술윤리위원회 이렇게 이름이 바뀌면서 있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그 기구가 해체가 됐죠.

◇ 정관용> 그렇죠. 아마 70년대, 80년대 초반 우리 정태춘 씨 노래를 즐겨듣고 흥얼거리셨던 많은 분들 가운데 어, 정태춘 어디 갔지 하고 어디 가셨는지 모르는 분들도 지금까지도 모르는 분들 많이 계실 것 같습니다. 어디 가셨었죠? 온갖 고통 받고 어려움 받는 해고 노동자들 집회 이런 데 가서 노래를 부르셨죠?

◆ 정태춘> 네.

◇ 정관용> 그거 모르시는 분들 많아요.

◆ 정태춘> 방송 출연을 거의 안 했고요. 그리고 현장에서 사람들하고 만났죠. 현장의 열기, 현장의 어떤 소망, 분노 이런 것들과 만나서 사람들하고 연대하고 그랬죠.

◇ 정관용> 하늘을 찌르는 인기 그리고 또.

◆ 정태춘>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 정관용> 그 많은 수입 이런 등등을 하루아침에 딱 접어두고 현장으로 달려가시게 된 이유는 뭡니까?

◆ 정태춘> 하루아침은 아니고요. 서서히 저도 변화가 됐죠.

◇ 정관용> 맨 처음에 어디에 가셨던 거예요?

◆ 정태춘> 청계피복노조죠. 전태일이 있었던 청계피복노조의 불법집회에 참가를 하면서.

◇ 정관용> 거기 누가 가자고 했어요?

◆ 정태춘> 그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좀 비밀스럽게 이 행사 자체가 노동조합 이런 말도 꺼내면 안 되니까 근로자들의 일일찻집이다. 이렇게 해서 갔는데. 거기에서 노동자들하고 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는 분들하고 만나고 그러면서 내 노래가 이분들을 위해서 쓰일 수도 있다. 활용을 하든 이용을 하든 이분들의 싸움에 쓰일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활동방향이 확 바뀌게 됐죠.

◇ 정관용> 그러면서 노래도 바뀌었죠.

◆ 정태춘> 네.

◇ 정관용> 보다 더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

◆ 정태춘> 그렇죠. 서정성 또는 얼마간의 낭만성 이런 것들이 조금 뒤로 물러가고 직설적이고 아주 어떤 부분에서는 지독한 독설 같은 글들도 담고 그리고 조금 더 리얼리티가 담긴 가사들 그리고 거친 음악 그런 한 장의 앨범이 있었죠.

◇ 정관용> 아까 우리 검열 안 받고 팔았던 ‘아, 대한민국’ 같은 그 가사를 보면 옛날 김지하 선생의 오적과 같은 그런 게 딱 떠오를 정도의 직설적 표현들이 가득 찬 그런 곡들 아니었습니까.

◆ 정태춘> 그리고 그다음 앨범부터는 조금 달라지는데. 그 시기에 우리 사회 전체의 어떤 민주화와 관련된 열망은 그런 노래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큰 동력이었고 또 그런 노래들이 많은 분들과 함께 짧은 시간이나마 아주 깊은 공감대를 가지고 주고받을 수 있었죠.

◇ 정관용> 그렇게 계속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하실 때 행복했나요?

◆ 정태춘> 물론이죠.

◇ 정관용> 다시 무대에 가고 방송에 나가고 싶은 그런 마음은 없으셨습니까?

◆ 정태춘> 아니요, 전혀 그런 생각은 없고요. 무대에서 공연들은 더러 콘서트 같은 것들이 더러 있었지만 이를테면 내가 가장 열정적인 시기에 그리고 어떤 사회의 공적인 정의의 현장에 함께하는 일은 그건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어떤 예술가가 자기 시대에 그런 요동치는 어떤 상황변화를 맞이하고 거기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꿈을 꾸고 같이 싸우고 한다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 정관용> 그러다가 아예 작곡도 안 하시고.

◆ 정태춘> 그러다가 앨범 두 장을 그 뒤에 석 장 정도를 냈던가요. 그 뒤에는 조금 더 우리 사회의 상황변화를 바라보면서 나도 조금 더 침잠하면서 조금 더 그렇게 관찰적인 그런 노래들을 한 세 장 정도의 앨범으로 발표를 했었죠. 그리고 일반적인 콘서트를 쭉 했었고. 그렇게 했는데 앨범들에 대한 반응은 별로 이제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반응이 없으면 노래를 접어야지 이렇게 된 거죠. 물론 이제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이 감정적으로나 이런 것들이 있죠.

◇ 정관용> 그 노래를 접어야지 이게 몇 년도죠?

◆ 정태춘> 아마 2000년 들어오면서 2010년 되기 전에 2005년경부터랄까.

◇ 정관용> 2005년경?

◆ 정태춘> 2005년경. 그러면서 그 뒤에 앨범이 하나 나왔는데 12년에 나왔는데 그건 그냥 박은옥 씨를 위한 앨범이다 이렇게 하나 했었고요, 잠깐. 그리고는 계속 노래는 안 만들고 있었죠.

◇ 정관용> 2005년경이면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시대상황을 보고 나도 조금 관찰도 하고 노래 스타일도 변화했는데 시장에서는 별로 반응이 없더라.

◆ 정태춘> 그리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특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데 내가 추구하는 어떤 음악들에 대한 수요가 없으니까 그러면 내가 빠질 수밖에 이렇게 된 거죠.

◇ 정관용> 그리고 한 10여 년을 시 쓰시고 이른바 붓글 쓰시고 사진도 하시고.

◆ 정태춘> 사진도 찍고. 가죽공예도 좀 하고. 한가하게 아주 행복하게 물론 그 상황과 떨어져 나가고 그러면서 또 사회 상황이 변화되는 것을 내가 전면적으로 이렇게 공감하거나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어떤 마음이 편치 않은 것들은 있었지만 그렇지만 좀 한가한 시간도 많이 나고요.


◇ 정관용> 그래도 그 기간에도 현장에서 이렇게 부르면 가셨잖아요.

◆ 정태춘> 일부 대추리 싸움까지만 했죠. 2006년 정도까지 대추리 고향 마을 사람들의.

◇ 정관용> 미군기지 반대.

◆ 정태춘> 마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참여하면서 그게 마지막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죠.

◇ 정관용> 그 후로는 현장에도 가시지 않았던 거예요?

◆ 정태춘> 안 갔습니다, 현장은.

노순택 사진작가의 <이천육년 삼월십오일 오후다섯시 정태춘은 노래부르지 않았다>

◇ 정관용> 그리고 이제 올해 40주년 맞아서 올해는 어쨌든 왕성한 활동 보여주고 계신데 앞으로의 계획은요?

◆ 정태춘> 앞으로는 우리 올해 겨울까지 콘서트 잘 마치고 25개 지역 이상의 콘서트 잘 마치고 그렇게 되면 다 되는데요. 내년에 이제 1년 동안 찍었던 영화가 나오니까.

◇ 정관용> 영화?

◆ 정태춘> 다큐멘터리 음악영화가 나오니까 그것 때문에 조금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는 다시 들어갈 생각입니다.

◇ 정관용> 또?

◆ 정태춘> 조용히. 나는 그냥 1년만 하겠다고 하고 나왔어요.

◇ 정관용> 내년부터 새로운 곡으로 여러분 많이 찾아뵙겠습니다 이 말이 아니네요. 그래도 꾸준히 시도 쓰시고 붓글도 하시고 하실 거잖아요.

◆ 정태춘> 붓글은 아마 조금 계속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정관용> 아주 가끔이라도 그런 거 전시라도 좀 하시죠?

◆ 정태춘> 여건이 되면.

◇ 정관용> 또 10년 기다려야 볼 수 있는 겁니까?

◆ 정태춘> 아니요. 이제 저 잊어버리셔도 돼요.

◇ 정관용> 그러나 우리 청취자분들은 잊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일단 오늘은 보내드리겠습니다. 정태춘 씨 고맙습니다.

◆ 정태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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