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데뷔 이래 '페인트'(Faint), '인 디 엔드'(In the end), '넘'(Numb)까지 메가 히트곡을 숱하게 냈고, 콧대 높기로 유명한 그래미어워즈에서 2002년과 2006년 두 차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무엇보다 린킨파크가 혁신적인 그룹으로 평가받는 건 한 장르에 머물지 않고 힙합 스타일 보컬과 DJ 도입, 뮤직비디오 자체 제작 등 변신을 거듭한 덕분이다.
그러나 한동안 세계 팬들은 린킨파크 활동을 볼 수 없었다. 2017년 7월 보컬 체스터 베닝턴이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감했고, 그해 10월 열린 추모공연이 세상과의 마지막 소통이었다. 멤버들은 사건 1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솔로 활동을 재개했다.
뮤직비디오 감독이기도 한 한국계 미국인 멤버 조지프 한(Joseph Hahn·42)은 지난해 방탄소년단이 유명 DJ 스티브 아오키(Steve Aoki)와 함께 만든 싱글 '웨이스트 잇 온 미'(Waste it on me)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다.
JTBC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밴드'에 심사위원으로 합류한 조지프 한을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인터뷰했다.
통통하던 볼살이 빠져 몰라보게 변한 그는 "제 한국어 수준이 딱 세 살 아이 정도니, 영어를 섞어 써도 이해해 달라"고 웃으며 말했다.
다음은 조지프 한과의 일문일답.
-- 얼마만의 한국 방문인가.
▲ 한국에 자주 온다. 작년에도 왔었다. 제 뿌리인 한국은 정말 빨리 변하는 곳이고 모든 종류의 가능성과 기회가 있는 곳이다. 새로운 음악과 영화, 신기술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
-- 과거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비무장지대(DMZ)에 가보고 싶다고 했었다. 실제로 가봤나.
▲ 작년에 그 근처까지 갔다. 정확한 이름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임진강이었던 것 같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북쪽 산과 농장들, 건물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북한에 늘 관심이 많다. 한국 사람들은 북한과 부대끼며 살아왔기에 덤덤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도 주변국과 분쟁에 익숙한 듯했다. 특정 지역에 산다 해서 두려운 일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어찌 됐건 삶은 계속된다. 언젠가 한반도에 긍정적인 미래가 도래하길 희망한다. 꼭 정치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남북이 통일되든 아니든, 우리가 저편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건 공평한 기회를 갖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나는 자유롭게 여행하고 TV로 재미있는 걸 볼 수 있지만, 저편에 사는 분들은 그런 선택권이 없지 않나.
-- 지난해 한반도에선 남북정상회담이 큰 이슈였다. 관련 보도를 봤나.
▲ 놀랍게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나는 서울에 있었다. 우리 세대는 그런 종류의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대화가 열리고, 양측이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만났다. 정말 담대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 이제 린킨파크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다. 정말 힘들겠지만 고(故) 체스터 베닝턴이 떠난 뒤 어떻게 버텨왔는지 얘기해줄 수 있나.
▲ 그는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가 그립다. 멤버들은 스스로와 가족들을 돌보고 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헤쳐나가고 있다. 그리고…이제 밴드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린킨파크가 컴백한다는 건가.
▲ 아마도 10년 뒤쯤? (웃음) 그보다 빠를 수도 있다. 다만 데드라인을 정해놓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그저 현재에 집중하고, 음악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세부적인 계획을 논의하고 있진 않다. 창고에서 음악을 만들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 새 음악을 만든다면 보컬 파트였던 체스터 빈자리는 누가 채우는 건가. 외부 영입이나 팀 내 다른 멤버가 부르는 것도 고려하나.
▲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 린킨파크 사진전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 맞다. 우리 마지막 투어 때 나는 사진기를 들고 멤버들을 찍었다. 공연하다가 잠시 내 순서가 아닐 때면 재빨리 멤버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이달 27일부터 5월 3일까지 중국 베이징, 상하이 3개 도시에서 먼저 연다.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하고 싶은데, 아직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 당신은 그래미어워즈 대중음악 부문에서 수상한 최초의 한국계 뮤지션이다. 지난 2월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시상자로 그래미 레드카펫을 밟는 걸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나.
▲ 질투 났다 하하하. 재능 면에서나 작사·작곡 능력에서나 한국은 이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방탄소년단의 탄생은 세계에 한국이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사건이다. 방탄소년단은 세계를 향해 다른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나는 방탄소년단을 내 후배나 동생이 아닌 동급 아티스트로 존중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색깔을 찾은 팀이다.
방탄소년단이 해온 것처럼, 앞으로 좀 더 많은 K팝 그룹이 전 세계 팬들을 겨냥해 음악 활동을 하면 좋겠다. 영어나 다른 언어로 된 앨범을 내는 것도 방법이다. 라틴 음악을 예로 들어보자. 라틴 음악은 거대한 수용층을 등에 업고 주류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으로 아시아 인구는 라틴 인구를 넘어선다. 아시아라고 못할 게 뭔가.
-- 방탄소년단의 '웨이스트 잇 온 미' 뮤직비디오 촬영은 어떻게 성사됐나.
▲ 방탄소년단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열심히 프로모션을 돌던 때가 있었다. 헝그리 정신이 돋보이던 시절이다. 방탄소년단 쇼케이스에 음악계 여러 유명한 사람이 갔는데, 마침 DJ 스티브 아오키의 매니저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매니저가 스티브에게 방탄소년단을 소개했고, 스티브는 방탄소년단에게서 진실함을 봤다고 한다. 그래서 '마이크 드롭'부터 '웨이스트 잇 온 미'까지 협력하게 된 거다.
그런데 마침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터졌다. 엄청나게 흥행했다. 동양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모멘텀이 된 사건이다. 스티브는 일본계 미국인이고 나는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그런 걸 떠나서, 같은 아시안으로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보자 싶었다. 안타깝게도 방탄소년단은 그때 스케줄 상 뮤직비디오 촬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계 코미디언 켄 정(Ken Jung)을 비롯해 할리우드 아시아 배우들과 인플루언서들을 섭외했다. 아시아인들이 총출동하는 축제 같은 뮤직비디오가 됐다.
-- 그러고 보면 당신은 DJ이자 미술가, 뮤직비디오 감독,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원동력이 뭔가.
▲ 사실 뮤지션이 되는 건 내 삶에서 우연한 해프닝이었다. 늘 음악을 사랑했지만 록밴드가 되거나 세계적인 DJ가 되는 걸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대학을 미술을 전공하기도 했고 늘 만화책과 일러스트레이션을 좋아했는데, 이런 것들이 나를 '비주얼 스토리텔러'로 이끌었다. 나는 때로는 시각을 통해, 때로는 청각을 통해 사고한다. 음악 활동이 비주얼 아트를 할 때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 '슈퍼밴드' 출연 이후 한국 활동 계획이 있나.
▲ 당연히 하고 싶다. 상업적인 활동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지만, 어떤 형태로든 기회가 생긴다면 피하지 않겠다. 오래전 린킨파크 멤버가 된 것도 내게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