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운데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과의 비핵화 대화 시한을 올해 연말로 한정짓고, 우리 정부를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역할이 아닌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문 대통령의 비핵화 발걸음은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 김정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성과 없는 불만 표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이후 침묵하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1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조선당국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또 "남조선 당국이 진실로 북남관계 개선과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갈 의향이라면 우리의 입장과 의지에 공감하고 보조를 맞추어야 하며 말로써가 아니라 실천적 행동으로 그 진심을 보여주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압박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 우리민족끼리 등 대내외 매체들이 북미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부를 비판한 적은 있었지만, 지난해 남북관계 개선 흐름이 시작된 이후 김 위원장이 직접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김 위원장이 남측의 비핵화 중재자 역할에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하면서, 한미정상회담 등을 통해 북미 대화 재개에 '올인'하는 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조건에서 제3차 조미(북미)수뇌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며 올해 연말까지 미국의 태도변화를 기다릴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 것은 북미대화의 불씨를 이어가려는 것으로 해석돼 긍정적 신호로 읽힌다.
특히 "나와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개인적 관계는 두 나라 사이의 관계처럼 적대적이지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훌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생각나면 아무 때든 서로 안부를 묻는 편지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언급한 것도 한미정상이 의견일치를 본 '톱다운' 방식의 비핵화 프로세스에 대한 동의로 해석할 수 있다.
◇ 4차 남북정상회담 통한 돌파구 마련 급선무
김 위원장이 우리 정부의 역할 부재와 미국의 일괄식 비핵화 로드맵에 불만을 표했지만, 대화 테이블을 올해 연말까지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면서 당장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북한 달래기가 문 대통령의 다음 행보로 지목된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지난 11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조만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는 의사를 공개했다.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문 대통령은 차기 북미정상회담이 비핵화 협상과정에서 또 다른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트럼프 대통령과 긴밀히 협력해 나갈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설명했다.
4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3차 북미정상회담을 견인하고 이 과정에서 북한이 원하는 일부 대북 제재 해제 등 단계적 비핵화 로드맵 작성은 물론 미국이 원하는 포괄적 비핵화 최종단계 합의까지 이끌어내겠다는 구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추진 계획에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한국이 파악하는 북한의 입장을 조속히 알려달라"라고 요구한 점도 우리 정부의 중재자 역할에 무게를 더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한미 단독정상회담에서 3차 북미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에게 "전적으로 김정은 위원장에게 달렸다"고 언급한 것 역시 4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북한의 유연한 입장변화를 요구한 것이어서 북미 비핵화 협상의 가교역할을 맡은 문 대통령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12일 저녁부터 주말 사이에 별다른 일정을 잡지 않은 채 비핵화 정국 구상에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당장 대북특사 파견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북특사로는 이미 두 차례나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던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유력하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북특사 파견 검토는 사실상 시작됐다"며 "정 실장이 일정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의 특사 파견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청와대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 속도보다는 내용이 중요…4·27 주년 지나 남북정상 만날 듯
4차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시점으로 예상되는 날짜 중 하나는 판문점 선언 1주년을 맞는 오는 4월 27일이다.
지난해 4·27 판문점 선언은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한 중요한 변곡점으로 한반도 정세 변화의 상징과도 같다.
이는 북미 정상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으로도 이어져 센토사 합의문에는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며,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적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준비기간이 채 2주도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북한 최룡해 노동당 부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14기 회의를 통해 신설된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임명된 것은 물론, 21년 만에 교체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맡으면서 북한 입장에서도 새로운 지도체제에 대한 일정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여기에 문 대통령도 오는 16~23일에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3개국 순방이 예정돼 있어 남북정상회담 준비에만 매진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따라 4월 27일이라는 날짜를 맞추기 보다는 남북간 충분한 실무협의를 통해 5월 이후에 남북 정상이 만나고,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을 찾는 5월 26~28일(국빈방문)이나 6월 28~29일(G20 정상회의)을 계기로 다시 한미가 의견을 교환하는 시나리오가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회담 결과에 따라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남북미 3자 정상회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2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은 지금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오랜기간 동안 자력갱생으로 버티면서 미국 쪽에서 제재완화에 대한 사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라며 "우리 생각만 하면서 4월 27일날 1주년에 정상회담을 또 한다는 것은 성급한 것이다. 5월 경에는 할 수 있으리라 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