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임정요인들중 김규식 주목한 까닭

대한민국 초대 외무총장 김규식에 대한 중국 평가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로, 당시 중국에서 분투했던 한인 애국지사들에게 다시금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많은 한인 애국지사들 가운데 김우사(金尤史)는 중요한 인물 중 하나다.

김우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 구국투쟁에 적극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교육사업에 있어서도 공을 세웠다. 혁명 전쟁 시기 중한 양국 국민들이 맺은 두터운 우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하다.

김규식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김우사(1881-1950)는 경상도 동래부(현 부산광역시) 출신이다. 본래 관료 가문의 자제였으나 가운이 쇠퇴한 탓에 남의 집살이를 하며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5세가 되던 해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입양되었고, 이때부터 영어와 서학(西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887년 선교사 언더우드의 도움과 지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일과 학업을 병행했으며 1889년에는 버지니아주 로녹 대학(Roanoke College) 문학과에 정식 입학했다.

1903년 대학을 졸업한 김우사는 프린스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석사 과정을 시작, 1904년에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학교 측은 그에게 박사 진학을 제안했지만 김우사는 이를 거절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1905년 대한제국으로 귀국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뒤 일본 제국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진압이 자행되던 1913년, 김우사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김구 등 독립지사들과 오랜 기간 밀접하게 연락했으며, 다수의 글로써 한국의 독립운동을 응원했다.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으로 취임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해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국인들을 감탄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중국 교육사업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 김우사는 상하이에 다수의 학교를 설립했으며, 중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김우사는 애국학생들을 지원하는 데도 아낌이 없었다. 1937년 '7·7사변' 발발 이후 쓰촨(四川)대학 사제들은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했는데, 외문(外文)과 학생 및 교수들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학교 측이 쓰촨대학 항적(抗敵)후원회를 결성하자 김우사는 '전시(戰時) 상식 편역(編譯)위원회' 위원이 되어 표어 붙이기·전단 배포·거리 유세·항일군대를 위한 모금 등을 호소하는 등 수 많은 구국활동을 전개했다.

1938년 10월 민국 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천도함에 따라 일본은 충칭과 청두(成都) 등 중국 남서부 지역 대도시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1939년 7월 27일 쓰촨대학교에 폭격이 가해져 학교 내 127개 건물이 폐허로 변했다. 이에 공습을 피하고자 쓰촨대학교는 어메이산(峨眉山)으로 이전을 선택했다.

김우사는 당시 58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솔을 이끌고 학교를 따라 움직였다. 어메이산 일대는 물자가 부족하고 환경 또한 열악했다. 김우사는 그러나 조금의 원망도 없이 어메이산에서 멀지 않은 러산(樂山) 시에 거처를 마련하고, 마침 러산으로 이전한 우한(武漢)대학교의 겸임교수를 맡았다.

이와 함께 김우사는 충칭으로 옮겨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잇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교육부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940년 9월 17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에 당선된 데 이어 1943년 2월 24일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으로 당선됐다.

이 밖에도 김우사는 중한문화협회에 참가해 펑위샹(馮玉祥), 위유런(于右任), 다이지타오(戴季陶), 저우언라이(周恩來), 둥비우(董必武), 궈모뤄(郭沫若) 등과 같은 많은 중국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중한문화협회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김우사는 중국 정부의 관심에 감사의 뜻을 표시하며 "중한 양국은 아시아 형제의 나라로서 생사의 운명을 함께 하는 우정을 쌓았고, 향후에도 중한 양국 민족의 영구적 독립과 해방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함에 따라 김우사는 마침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간다. 조국을 떠난 지 26년만의 일이었다. 귀국을 앞두고 김우사는 여러 편의 시를 썼다. 쓰촨과 충칭 지역 풍광의 아름다움, 중국 인민과 쌓은 돈독한 정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이후 그는 줄곧 반(半) 중국인을 자처하며 살았다.

※본 기사는 중국 인민화보사에서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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