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충무로 인쇄골목에선 지금 무슨 일이?

은행권 "인쇄업체 대출 더 이상 해줄 수 없어"…지류업체 도산도 잇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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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인쇄물량의 70%를 처리한다는 서울 충무로·을지로 일대. 지난 30일 오후, 충무로의 인쇄 골목에는 사무실 임대 전단지가 곳곳에 나붙어 있다. 인쇄업체들의 폐업과 부도가 잇따르면서 빈 사무실이 늘고 있어서다.

오후 3시 무렵 한 부동산 중개소에 들어가 봤다. 중개업자는 "아침에 부동산 문을 연 뒤 단 한명도 방문하지 않았다"며 "오늘은 길을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8개월째 매매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하던 그의 얼굴에는 체념만 남아 있었다. 주변에는 임대료를 내지 못하는 세입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실제로 부동산 중개소 옆에 위치해 있는 인쇄소의 경우는 월 60만원 하는 임대료를 석달째 내지 못하고 끝내 가게 문을 닫았다고 했다. 제약회사의 전단지를 제작해 가게를 운영해 왔지만 주문이 중단되면서 폐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중개업자가 보여준 인쇄소 사무실에는 인쇄기 한 대와 인쇄물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 보다 규모가 큰 다른 업체들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5억원짜리 오프셋 인쇄기 1대로 카탈로그를 주로 찍는 금호기획인쇄의 홍석만 사장은 "월 800만원하는 리스 비용을 조달하기도 벅차다"고 말했다.


그는 "인쇄업종의 특성상 야간 잔업을 통해 수익을 남기는데, 예전에는 20일 정도 했던 잔업을 지금은 10일 정도 밖에 하지 않아 이익의 50%가 줄어든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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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인쇄업계에서 연말은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로, 한해 인쇄물량의 60%가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집중돼 있다.

달력과 수첩, 가계부, 연하장, 기업 연말 보고서 제작 주문이 쏟아져 24시간 풀 가동돼도 주문량을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 그 동안의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가동을 멈춘 인쇄기들이 많다.

연말 특수를 누려야할 인쇄업 시황이 이렇게 꽁꽁 얼어붙은 것은 불경기를 겪고 있는 다른 기업들이 인쇄량을 줄였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은 매번 3000부의 사보를 제작해 오다가 이번에는 280부로 대폭 줄였고, 또 다른 식품기업은 달력 제작을 아예 하지 않기로 했다. 모 건설업체는 건설업 불황으로 사업이 중단되면서 카탈로그 주문을 취소했다.

그러다보니 달력이나 수첩을 디자인하는 기획사들과 인쇄소에 종이를 공급하는 지류(紙類) 업체들도 최근 도산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인쇄회사를 운영중인 정모씨는 "최근 문을 닫은 종이 유통업체는 아는 곳만 2곳이고 부도난 인쇄소도 서너 곳이나 된다"고 말했다.

"이보다 사정이 나은 회사들의 경우는 직원 감원에 나서거나 시설을 감축하는데, 어느 회사는 인쇄기 3대 가운데 2대를 처분 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 일대에 운영중인 인쇄업체는 줄잡아 100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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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 충무로역 지점 관계자는 "부실채권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인해주기 어렵다"라면서도 "현재 인쇄업체에 신규대출은 더 이상 해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종이 유통업을 하는 푸른솔특수지 박광은 대표는 "예년 같으면 종이를 떼어가려는 지개차들로 가게 앞이 시끌벅적해야 정상인데 요즘은 보시다시피 조용하다"며 "지금은 충무로 일대가 공황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들의 인쇄물량은 기업의 상태를 보여주는 온도계와 같아서 경기 패턴을 읽을 수 있는 잣대"라며 "따라서 인쇄업체들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다른 업종에서는 문제가 시작된 지 오래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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