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김삼웅(前독립기념관장)
오늘 4월 11일은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이렇게 헌법에까지 명시된 그 뿌리. 그 뿌리가 시작된 지 딱 100주년이 되는 날인 거죠.
지금 들으시는 분들 중에 '아니, 임정 수립일이 4월 13일 아니야?' 하는 분들 계실 텐데요. 여태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랍니다. 이게 4월 11일로 어떻게 바로잡히게 된 건지 오늘 임시 정부 수립일을 맞아서 우리 사회를 향해서 거침없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분.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만나보겠습니다. 김삼웅 선생님, 안녕하세요?
◆ 김삼웅> 안녕하셨습니까.
◇ 김현정> 건강하십니까?
◆ 김삼웅> 네, 잘 있습니다.
◇ 김현정> 매해 맞는 임정 수립 기념일입니다마는 이 100년을 맞는 소회는 확실히 다르시죠, 관장님?
◆ 김삼웅> 그렇습니다. 그동안 망각되고 외면되고 홀대받았던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다 보니까 어느 해 못지않게, 어느 해보다 더 감격스럽고 기쁩니다.
◇ 김현정> 지난해까지만 해도 임정 수립일 그러면 4월 13일로 우리가 알고 챙겨왔는데 여태까지는 왜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예요?
◆ 김삼웅> 그러니까 이게 해방 후에 좀 혼란한 틈 때문이기도 하고 연구가 부족하기도 했고. 일본 정보 기록에는 4월 13일로 돼 있어요. 그러니까 4월 11일 날 우리 임시 의정원이 탄생했고, 의정원에서 약헌도 만들고 정부 수립을 다 선포를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정보 기관이 그걸 잘 몰랐던 거 같아요.
◇ 김현정> 그랬다가 자신들이 알게 된 4월 13일을 가지고 기록했는데 우리는 처음 바탕으로 해서 4월 13일로 하다 보니까 쭉 그냥 이어져온 거군요.
◆ 김삼웅> 그랬어요.
◇ 김현정> 그렇게 된 거군요. 지금이라도 바로잡혀서 다행입니다. 이렇게 여성, 남성, 계급을 막론하고 온 민중이 독립 운동을 해서 얻은 성과물이 바로 임시 정부였던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질문하세요. 아니, 뭐 독립 운동 기념하고 3.1절 기념하면 됐지 임정 수립일까지 또 따로 떼서 이렇게까지 대대적으로 기념해야 되는 이유가 뭔가? 어떤가요?
◆ 김삼웅> 기미년 3월 1일이 3.1 혁명의 기점이었다고 하면 3.1 혁명 독립 선언서에서도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독립국이라고 선언을 했으면 이것을 이제 정부가 있어야 리드를 할 수 있어서 4월 11일 날 정부가 수립이 된 겁니다, 임시 정부가. 그런 날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자기 생일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하고 진배없다고 생각합니다.
◇ 김현정> 독립 선언을 했다면 국가가 탄생해야 되는데. 바로 그 국가가 탄생한, 임시 정부가 탄생한 날인데 그게 어떻게 중요하지 않겠느냐. 그 말씀이세요. 지금 말씀하시는 와중에 그런데 관장님, 3.1 운동이라고 안 하고 3.1 혁명이라고 그러시네요?
◆ 김삼웅> 분명하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3.1 혁명입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볼게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자주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국민의 10분의 1 이상이. 그리고 군정 체제의 복속이 아니라, 임금 체제의 왕정 체제가 아니라 민주 공화제를 선언했어요.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4000년 역사상 가부장제에 시름하던 여성들이 역사 현장에 들고 일어난 겁니다. 그 3.1일 날 탑골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할 때 낡은 흑백 사진을 보면 맨 앞에는 여성들이 나와 있어요. 여성들 숫자가 더 많습니다. 여성들이 역사 현장에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다수가 이렇게 참여한 것은 3.1 혁명이 처음이거든요.
그 엄청난 변혁적인 사건을, 혁명적인 사건을 운동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선열들의 모독일 뿐만 아니라 역사, 사회,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부적합하다고 해서 저는 3.1 혁명이라는 용어를 오래전부터 써 왔습니다.
◇ 김현정> 커다란 변혁, 큰 변혁이라는 의미에서의 혁명이라고 하면 혁명이 맞죠. 그런데 일각에서는 전문가들 중에 그런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이 3.1 운동은 비폭력 운동이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프랑스 혁명처럼 혁명이라는 걸 붙이는 순간 피를 보는, 우리가 칼과 총을 들고 싸웠다는 이런 식의 프레임을 씌워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폄하가 아니라 운동이라고 붙이는 것이다, 비폭력에 방점을 둔' 이거는 어떻게 보세요?
◆ 김삼웅> 3.1 혁명 때 3대 원칙이 있었어요. 비폭력, 일원화, 대중화. 그것이 운동이었다고 하면 좌절됐습니다, 일본의 총칼 앞에. 혁명이라고 해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이 되고 대한민국은 임시 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명시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라도 혁명이라는 정명을 이제라도 찾아야 된다고 저는 주장을 합니다.
◇ 김현정>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러면 또 하나의 논쟁거리 제가 질문드릴게요. 지금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 대표를 중심으로 강하게 문제 제기했던 게 보훈처가 월북한 독립 운동가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해서, 영화 암살에 나왔던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해서 서훈을 수여할 수도 있다. 이렇게 발표를 하자 '아니, 뼛속까지 북한 공산주의자고 월북해서 거기서 고위직까지 지낸 사람한테 우리가 서훈을 주면 그러면 김일성도 줘야 되는 것 아니냐' 뭐 이렇게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러면서 여러 가지 갑론을박들이 오가고 있는데 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 김삼웅> 역사를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본다는 데 대해서 참 안타깝기 그지 없는데요.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김원봉과 의열단이 없었다고 하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대단히 빈약했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의열단과 김원봉이 차지하는 비중이, 역할이 대단히 큽니다.
일제가 혈안이 돼 가지고 김원봉과 의열단을 쫓아다니면서 독립 운동가 중에서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고 실제로 의열단의 활동, 김원봉의 지침. 특히 조선 의용대가 2개로 의용군하고 의용대로 분류됐을 때 의용군은 연안으로, 공산군 쪽으로 올라가고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용대는 중경, 임시 정부로 들어왔어요. 그리고 좌우 합작을 한 겁니다.
그런 공로는 배척하고 해방 후에 북한에서 요직을 맡았다는 단세포적인 그 사건만 가지고 평가를 한다고 하면 그분들의 헌신은 어떻게 보상을 할 겁니까? 그리고 김원봉은 북한으로 가지 않았으면 여운형이라든가 김구 다음에 암살당했을 것은 뻔한 거거든요.
그리고 북한에 가서도 1958년 이후에는 숙청됐는지 일체 존재 자체가 없어져버리고 저도 평양 애국열사능을 가서 찾아봤습니다만 다른 애국지사들은 다 묘비가 있는데 김원봉 선생은 묘비조차도 없어요. 북한에서도 제외된 겁니다.
◇ 김현정> 숙청을 당했는지 어쨌는지 북한에서도 흔적이 없어요, 김원봉 선생이?
◆ 김삼웅> 58년 이후에는 흔적이 없습니다.
◇ 김현정> 58년이면 한참 전인데 그 이후로는 남아 있는 게 없다. 묘비도 없습니까?
◆ 김삼웅> 묘비도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가장 투철한, 가장 치열했던 김원봉의 묘소까지도 만들지 않았을 정도로. 그런 분을 우리가 포용하고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사에 편성한다고 해서 그걸 마치 김일성한테까지 표창을 해야 되느냐, 상을 줘야 되느냐라고 비약한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거나 단세포적인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 김현정> 그렇게 비유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북한에서도 이미 한참 전에 배척당하고 묘비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얘기는 그러면 북한 내에서 독재자들과 어떤 트러블 같은 게 있었다는 얘기일까요, 그 당시 독재자들과?
◆ 김삼웅> 그러니까 판단하건대 김원봉은 우리 독립 운동군의 총사령관적인 위치에 있었고 김일성 북한 주석은 독립 운동을 하기는 했지만 그 연대장이나 대대장급 수준에서 독립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비교가 되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북한 정권이 6.25 전쟁 이후에 남로당을 숙청하고 두 번째 연안파를 숙청하고 세 번째는 김원봉을 숙청하지 않았는가. 김원봉과 의열단 출신들은 남쪽에서도 배척되고 북쪽에서도 배척당하고 가장 치열하게 독립 운동을 하고도. 애달픈 그런 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 김현정> 그래서 우리가 포용해야 된다 그 말씀이시군요. 가장 치열하게. 일제가 걸었던 현상금이 가장 높았던 그런 독립 운동가를 북이 버렸는데 우리도 버린다면 이거는 아니다라는 그런 의미이신 거예요.
◆ 김삼웅> 그렇습니다.
◇ 김현정> 그런데 저렇게 또 반대하는 분들이 계시니까 이게 서훈을 주게 되면 남남 갈등이라고 하잖아요. 우리 내부에서의 갈등이 커질 것 같은데 그건 괜찮을까요?
◆ 김삼웅> 역사 인식을 새롭게 해야 됩니다. 우리가 적대 국가였던 일본하고도 수교를 해서 한 40년이 됐고. 그걸(김원봉 서훈 논의를) 정략화시키고 하려고 하는 그런 사고들이, 바탕들이 잘못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 김현정> 김원봉을 정쟁화하지 말아라. 이거는 정치권에 보내주는 경고군요.
◆ 김삼웅> 그렇습니다.
◇ 김현정> 알겠습니다. 우리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약산 김원봉 평전을 쓰시기도 한 분이어서, 정통하게 김원봉 선생에 대해서 알고 계신 분이어서 제가 이 질문 드려봤습니다. 관장님, 임시 정부 100주년 정말 뜻깊은 날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돼서 참 좋은데요. 끝으로 듣고 계시는 우리 청취자들께 한말씀.
◆ 김삼웅> 우리 임시 정부는 해외에다가 망명 정부가 아닌 임시 정부를 세우면서 내세웠던 가치가 자주 독립과 민주 공화제였습니다. 다른 나라 외국의 임시 정부나 망명 정부는 대부분이 군정 체제였어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런던에는 한 10개 정도의 망명 정부가 세워졌고 하나같이 군정 체제였는데 우리 선열들은 그런 전시 속에서도 민주 공화제를 채택하고 의정원을 먼저 만들었습니다, 국회죠. 의정원을 먼저 만들어서 의정원이 임시 정부를 통제할 수 있도록 그렇게 민주적인 선각 의식을 보여줬습니다. 그런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가 지금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하는 행태를 보면 100년 전의 의정원 활동보다도 훨씬 더 후진적인 것 같습니다.
◇ 김현정> 그렇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정말 배울 게 많네요. 임시 정부. 우리 이 시대 사람들이야 다 영화 같은 걸 통해서 봅니다마는 봐도 뿌듯해요.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저는 갈수록 그런 생각이 더 드는데 바로 여러분 4월 11일이 그런 날입니다. 우리 뜻깊게 이날을 기리면서. 관장님,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김삼웅>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현정> 건강하세요.
◆ 김삼웅> 네, 감사합니다.
◇ 김현정> 독립기념관장을 지내신 분이죠. 김삼웅 선생님이었습니다. (속기=한국스마트속기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