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가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생일'(감독 이종언)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문득 그 노란 리본이 떠올랐다. 물론 설경구는 '생일' 출연 여부와 상관없이 노란 리본을 단 것이었다. 큰 건 아니지만, 세월호를 기억하는 자기만의 방식이라며.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생일' 정일 역을 맡은 배우 설경구를 만났다. 인터뷰 말미 노란 리본 얘기를 꺼내자 그는 최근 임시완 전역 날 공개한 머리 깎는 사진 이야기를 했다.
그냥 입대 전 머리 깎는 모습의 사진을 올렸을 뿐인데 그때도 노란 리본이 그려진 핸드폰 케이스가 같이 찍혔다는 내용이었다. 모르고 있다가 누군가 귀띔해줘서 뒤늦게 알았다며, 기자들에게도 본인의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노란 리본과 연결된 설경구의 기억이 이렇게 하나 더 늘었다.
◇ 전도연이 의외로 너무 힘들었다는 '이혼 서류' 장면, 설경구는?
정일의 아내 순남 역의 전도연은 '생일' 인터뷰 때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려웠던 장면으로 정일에게 이혼 서류를 주는 걸 꼽았다. "오래 생각한 거야"라는 짧은 대사를 하기까지 꽤 힘들었다고.
이 이야기를 전하자 설경구는 "저는 황당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라며 껄껄 웃었다. 그러곤 이내 "순남도 머리로는 (정일의 상황을) 알면서 용서가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아픔이) 지금도 감당 안 되기 때문에 알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설경구는 "정일이 거기서 서류를 받아버리면 (순남은) 더 쓰러지지 않을까. 사람은 그런 때도 있는 것 같다. 마음에 없는 소리까진 아니어도, (사정을) 알면서도 용서가 안 되는 그런 경우가"라고 말했다.
설경구는 이런 순남의 변화가 정일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바라봤다. 설경구는 "저한테 설득당했다기보단, 예솔이도 '엄마는 왜 오빠 생일 하기 싫어해?'라고 하고, 옆집에서도 (치유공간 이웃) 원장님도 끊임없이 하자, 하자 하면서 손잡아주지 않나. 저는 감독님이 얘기하고 싶었던 게, 우리가 손잡아줘야 한다는 거, 그게 모임에 데려간다는 의미 같다"고 설명했다.
다 같이 모였기 때문에 나오는 '힘'의 의미도 이야기했다. 설경구는 "은빈이(권소현 분) 같은 경우는 세월호에 있었다는 것도, 수호의 친구였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도 거부하지 않나. 그 친구도 (결국 생일 모임에) 오는데, 그게 우리들, 우리 전체의 힘이 아닌가 싶다. 일어서서 어렵게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 조심스러웠지만 감독님만 '철석같이' 믿고 가다
가볍지 않은 소재를 다룬 영화라고 해서, '배우 설경구'의 태도가 특별히 달랐던 건 아니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잃지 않고자 했던 신념이나 태도가 있는지 묻자, 그는 "매일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 저는 배우니까. 물론 이전 영화보단 조심스럽긴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에 관해서는, 이종언 감독을 굳게 믿고 갔다. 혹여 미숙하거나 과잉되게 표현된 게 있으면, 잘 걸러내 주리라고 믿고. 설경구는 이 감독을 "굉장히 딴딴했다"고 표현했다.
고장 난 센서등, 여권 도장 받기 등 작품 안에 나오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실제로 있었던 데서 따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건 정말 있었던 일이냐고 물어보면 즉각적으로 정확한 답이 나오니 신뢰할 수밖에 없었단다.
이어, "'생일'이란 영화 때문은 아니었다. 그때 되게 미안했었다. 그건 저만의 안 잊으려고 하는 작은 거다. 저만의 작은… 기억하는 방식이랄까"라고 덧붙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어떤 책임이나, 역할에 관해 생각해 본 게 있냐는 질문에 설경구는 "그건 말 못 하겠다. 왜냐하면 그 말조차 위선 같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제가 (하려면) 말할 수 있어요. 근데 도덕책 읽을 것 같아요. 써둔 대로 읽을 것 같아요. 좋은 말, 멋있는 말 많으니 그걸 할 순 있지만 제가 그 말을 지키면서 못 살 것 같거든요. 그것조차도 위선이니까요."
◇ '지천명 아이돌'의 바람
설경구는 2017년 개봉한 영화 '불한당' 이후 팬이 부쩍 늘었다. '불한당'이란 작품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의미를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즐기는 열성 팬들 '불한당원'이 그 출발이었다. 그러다 배우 설경구의 팬이 된 이들도 꽤 많다. 그는 뜨거운 인기에 힘입어 지난해 생애 첫 팬 미팅을 열기도 했다.
이제 설경구 이름 앞에 붙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식어 '지천명 아이돌'을 꺼내니 그는 "요즘엔 제가 뻔뻔스러워져서 인정한다"며 웃었다. 그는 "기자분들이 붙여준 거로 아는데, 나이가 50인데 강남역에 개인 광고판이 붙으니까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팬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며 기회가 될 때마다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설경구는 "전 잘해준 거 없어요. 제가 뭘 잘해드려요. 저는 받기만 해서 죄송한데… 너무 받아서"라고 말했다. 이어, "적극적으로 목소리 내 주시고, 베를린까지 오시고 감사하다. 항상 감사하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하다. 다 좋다. 뭐가 싫겠냐"며 웃었다.
설경구의 지금 바람은 자신의 팬들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아 '생일'을 보는 것이다. 그는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시길 기대하는 마음이다. 유가족분이 '생일' 보신 후 인터뷰했을 때 (영화가) '힘이 된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손을 잡아주셔야 한다. 같이 관람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