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분오열된 임시정부, 어떻게 통합 기틀 닦았나

[임시정부 27년의 기록 ⑨] 기강 시기 1939.04~1940.09

※이 글은 100년전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각종 문헌과 기록, 인터뷰에 기반해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임시정부가 중국내 8곳의 도시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가상의 주인공 '나'를 앞세워 내러티브 방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②100년전 4월 혁명의 거점 상해에선 무슨일이
③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④중일전쟁 발발로 풍전등화의 처지 임정
⑤내부의 적이 쏜 흉탄에 갈등의 골만
⑥위태로운 임정에 가해진 네 발의 총격
⑦지독히도 임시정부를 괴롭힌 일본군의 폭격
⑧한국 청년들의 멋과 흥으로 유주 땅을 뒤흔들다
※[팩트체크] 1948년 건국 논란, 이승만도 부정했다?
⑨임정의 정신적 지주 이동녕 타계하다


석오 이동녕
우리는 장장 9일동안 버스를 탄 뒤에야 기강에 내릴 수 있었다. 기강에 도착한 이후, 남은 임정 식구들은 모두 한숨을 돌렸다. 나도 떠돌이 임정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고, 임정 국무위원들을 모시는 가운데서도 내 자신을 챙길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행복과 불행은 같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임정이 기강으로 옮긴 지 1년을 한 달 앞둔 40년 3월 임정의 주석을 역임했던 어르신 이동녕 선생께서 죽음을 맞았다.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이자 큰 어른으로 존경 받던 이동녕 선생의 죽음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이동녕 선생은 임정 내 사분오열된 당들이 하나로 통합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 장례식
이동녕 선생의 유언은 임정의 당파 통합이었다. 실제 통합 작업은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 또한 여러 차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요구했던 터였다.

이에 따라 국민당 정부는 김구 선생에게 통합의 뜻을 전했고 김구 선생이 찬성하자 김원봉 선생에게도 연락했다.

1940년 1월 마침내 두 사람은 만남을 가졌다. 민족진영과 좌파진영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했다.

주의와 사상을 초월하자는 성명이었다. 얼마 뒤 기강에서 '한국혁명운동 7단체 회의'가 열렸다.

한국독립당 창당 사진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등 민족진영과 좌파진영을 총 망라한 단체가 모여 논의를 시작했다. 7개의 단체가 모인 만큼 회의는 쉽지 않았다.

각 당의 이해관계가 극히 대립됐고 결국 회의는 결렬됐다.

그러나 광복진선에 속하는 3당은 한국민주독립당이란 이름으로 통합 정당을 창당할 것에 합의했다.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도 국무위원제에서 주석제로 변경했다.

새 주석에는 김구 선생이 선임됐다. 임정 사람들 사이에는 김구 선생이 이제부터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대표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감돌았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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