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②100년전 4월 혁명의 거점 상해에선 무슨일이 ③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④중일전쟁 발발로 풍전등화의 처지 임정 ⑤내부의 적이 쏜 흉탄에 갈등의 골만 ⑥위태로운 임정에 가해진 네 발의 총격 ⑦지독히도 임시정부를 괴롭힌 일본군의 폭격 ⑧한국 청년들의 멋과 흥으로 유주 땅을 뒤흔들다 ※[팩트체크] 1948년 건국 논란, 이승만도 부정했다? ⑨임정의 정신적 지주 이동녕 타계하다 |
하지만 행복과 불행은 같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임정이 기강으로 옮긴 지 1년을 한 달 앞둔 40년 3월 임정의 주석을 역임했던 어르신 이동녕 선생께서 죽음을 맞았다.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이자 큰 어른으로 존경 받던 이동녕 선생의 죽음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이동녕 선생은 임정 내 사분오열된 당들이 하나로 통합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에 따라 국민당 정부는 김구 선생에게 통합의 뜻을 전했고 김구 선생이 찬성하자 김원봉 선생에게도 연락했다.
1940년 1월 마침내 두 사람은 만남을 가졌다. 민족진영과 좌파진영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했다.
주의와 사상을 초월하자는 성명이었다. 얼마 뒤 기강에서 '한국혁명운동 7단체 회의'가 열렸다.
각 당의 이해관계가 극히 대립됐고 결국 회의는 결렬됐다.
그러나 광복진선에 속하는 3당은 한국민주독립당이란 이름으로 통합 정당을 창당할 것에 합의했다.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도 국무위원제에서 주석제로 변경했다.
새 주석에는 김구 선생이 선임됐다. 임정 사람들 사이에는 김구 선생이 이제부터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대표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감돌았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