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②100년전 4월 혁명의 거점 상해에선 무슨일이 ③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④중일전쟁 발발로 풍전등화의 처지 임정 ⑤내부의 적이 쏜 흉탄에 갈등의 골만 ⑥위태로운 임정에 가해진 네 발의 총격 |
◇상해를 떠나며 시작된 임정의 갈등
나는 그저 이름없는 '무명'이었다. 끝없는 투쟁에도 '광명'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상해를 떠난 후 비관적 생각에 빠진 이유는 임정의 궁핍한 사정과 임정내 사분오열되는 세력의 갈등이었다.
당초 상해에서 임정은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연이은 의거로 국민당 정부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연이은 의거는 한편으론 임정에게 고난한 여정길의 서막을 올리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 조계당국은 임정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해온 것이다.
그 길로 임정은 상해를 떠나 지독히도 먼 여정에 올랐다.
상해를 떠난 김구 선생은 일본군의 집중 표적이 됐다. 일본군은 밀정 300여명과 현상금 60만 원을 걸고 김구 선생 체포에 총력을 다했다. 때문에 김구 선생은 항주 임시정부 청사로 이동하지 못하고 항주의 근교인 가흥에 머물렀다.
상해를 떠난 김구선생과 나는 절강성 주석 저보성의 도움으로 가흥 매만가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구 선생은 가흥 매만가 집 앞을 빗자루질 하던 나를 나지막히 불렀다.
"이따 저녁에 잠시 내방에 들르게나"
이 말을 들은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평소 필요한 얘기만 짧게 하던 김구 선생이 무슨 연유로 저녁에 나를 부르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저녁.
똑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들어오거라."
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억지로 추스르고 김구 선생의 방으로 발걸음을 땠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 적막한 한기가 우리 두 사람을 감쌌다.
김구 선생은 어렵사리 입술을 땠다.
"임시정부가 좀처럼 난항에 빠진 형국일세. 내가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항주에 닿지를 못하니 각 세력이 난립하고 있네. 그들은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조선의열단,한국광복단동지회등 각 당의 지도자들이 통일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세력으로 등극을 꾀하고 있다고 하네."
"지금의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와 다름없네. 각 당의 화력을 하나로 합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대일전선도 무너질 수밖에 없네."
이 말을 들은 나는 고국에서 상해로 떠나올 때는 생각지도 못할 역경에 머리를 감싸쥐며 생각했다.
"당장 이달 먹을 식량을 걱정해야 하는 판국에 임정 내 세력 마저도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형국이라니..."
대의도 원칙도 없는 임정에 나는 절망했다.
◇백범김구 내부의 적에게 저격당하다
상해를 떠나며 시작된 임정 내 갈등은 좀처럼 봉합되지 못했다. 항주-진강-장사를 거치면서 일본의 포위망은 임시정부를 더욱 좁혀왔고, 임정은 각 당들이 난립하고 분열된 채로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항주-진강을 벗어나 장사에 자리잡은 임정은 1938년 5월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에서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그리고 김구선생이 속한 한국국민당의 통합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3당 통일을 논의하기로한 1938년 5월 6일 나와 김구 선생은 아침부터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으로 향했다.
남목청 청사는 화려했다. 중국식과 서양식을 절충해 만든 건물 외벽은 고풍스러웠고, 회담장 내부는 무거운 의제를 논하기에 적당한 근엄함을 갖추고 있었다.
회담장에 입장한 나는 김구 선생의 뒤쪽에 배석했다.
나는 긴장감과 상기되는 기분을 억누르며 3당 주요 인사가 논할 의제와 연설문을 차분히 검토하며 정신없이 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윽고 3당 주요 인사들은 자리에 배석했고, 김구 선생의 모두발언으로 회의가 시작됐다.
"3당 합당을 논의하기 위한 이 역사적인 날은 하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나의 국민을 위한 움직임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김구 선생의 첫 언설이 실내로 퍼져나갈 즈음 회담장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조선혁명당의 이운한이 연설을 듣던 도중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고 무명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때였다.
이내 일어선 이운한은 김구 선생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탕.
이운한이 발사한 흉탄은 김구 선생의 뼈를 부쉈고, 피부를 찢어내곤 허공으로 사라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급히 책상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세 발의 총성이 더 들렸고 정적이 찾아 왔다.
이운한이 발사한 총알은 현익철,유동열,이청천의 몸을 관통했다.
회담장은 일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총성이 멎고 세를 살피니 이운한은 도망가고 없었다. 현익철, 유동열, 이청천, 김구 선생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와 하급관리들은 쓰러져 있는 주요요인들을 인근의 상아의원으로 급히 이송했다.
나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김구 선생을 병원에 이송시키고 발만 동동구르고 있었다. 그런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상아의원의 의사는 나에게 비보를 전했다.
"제 소견으로는 환자가. 다시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입원 수속보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나는 의사의 말을 듣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기분에 자리에 털썩 주저 않고 말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임정의 대들보인 선생이 돌아가신다면 이 난세를 어떻게 흑흑흑..."
좌절한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상아의원내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피로일지 슬픔일지 모를 것이 섞여 잠에 빠지고 말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김구 선생은 이내 끊길 듯 하던 숨을 네 시간 동안 쉬며 이승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때 비로소 가망이 있다고 판단한 의료진은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갔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의사로부터 낭보를 듣고 그제서야 입원 수속과 뒷수습에 들어갔다.
이후 큰 수술 몇 번을 거치고 김구 선생은 의식을 회복했고, 기적적으로 위중했던 병세가 낫기 시작했다. 이운한이 쏜 탄환이 심장 바로 옆인 갈비뼈로 옮겨간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조선혁명당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했고, 유동열과 이청천은 중상을 입었다.
며칠 후 국민당 정부가 이운한을 체포해 옥에 가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탈옥했다는 소식이 나에게 전해졌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