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리틀 드러머 걸' 찍다 머리 하얗게 셌죠"

[노컷 인터뷰] 영화에서 영국 TV 시리즈물에 뛰어들기까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남의 얘기 아니라고 생각해"
"OTT '왓챠'로 찾아온 이유는 감독판 개봉 가능했기 때문"
"'리틀 드러머 걸' 시간 부족이 문제…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함 없는 평범한 삶이라 새로움 찾아 헤매는 것"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의 박찬욱 감독. (사진=(주)왓챠 제공)
박찬욱 감독은 그 동안 자신의 미학과 철학을 영화 속에서 실현해왔다. 음악, 공간, 카메라 앵글은 물론이고 곳곳의 미장센과 서사 흐름까지 박찬욱 감독에게는 확고한 스타일이 있다. 로맨스와 결합한 스파이물 '리틀 드러머 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존 르 카레의 원작 소설에 매료된 박찬욱 감독은 영국 방송국 BBC에서 6부작 TV 시리즈로 이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전작 '아가씨'에 이어 이번에도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여성 캐릭터 찰리(플로렌스 퓨 분)가 영화를 이끈다.

스파이물 역시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 나간다. 액션이나 트릭을 통한 긴장감보다는 찰리를 중심으로 각 캐릭터를 끊임없이 교차시키는 관계를 통해 밀도 높은 서사를 쌓는다.

시간과 제작비에 쫓겨 다소 힘들었던 제작 과정까지도 박찬욱 감독에게는 또 다른 활력이자 도전이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는 침착하고 솔직하게 '리틀 드러머 걸'의 탄생기를 되돌아봤다.


그 모습은 박찬욱 감독의 주장대로 일견 '평범'해 보였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통찰은 쉼없이 계속될 예정이다.

다음은 박찬욱 감독과의 일문일답.

▶ 그 동안 영화라는 플랫폼을 계속 해오다가 드라마에 도전했다. 드라마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와는 다른 지점이 있었을텐데 신경을 쓴 부분이 있나.

- 원작 소설은 하나의 덩어리이지만 6개로 나눠서 어디까지 갈 것인가 생각했다. 고집해서 완성한 게 지금의 결과물이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어떻게 끝나는지 그걸 만드는 게 중요했고,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극적인 정점을 찍는 순간에 끝내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테마와 잘 결합된 최적의 엔딩으로 만들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찰리의 긴 모험 여정 속에서 중요한 계기를 하나씩 설정해서 새로운 무언가와 만나 끝나게 된다. 만약 TV 시리즈를 또 한다면 이것 때문에 할 것 같다.

▶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이 소재다. 상당히 민감한 소재인데 어떤 관점에서 이 소재를 풀고 싶었나.

- 우리 한국의 현대 역사와 비슷한 사건들이 자행되고 있었다. 영국이 이 분쟁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고 그래서 영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의 정당성을 갖게 된다. 제국주의자들의 농간으로 인해 약한 나라들이 이리저리 휘둘리며 엄청난 고통 속에 내던져지는 게 남의 일은 아니다. 한 번 폭력과 전쟁으로 상처가 나면 회복되기 어렵다. 엄청난 증오를 낳는데 그 증오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큰 폭력을 유발한다. 이런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할퀴는지, 그리고 그 회복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됐다.

▶ 비슷한 측면은 많지만 한국과 직접 연관된 역사적 사건들은 아니다. 외부인의 시선에서 이를 검증해가며 작품을 제작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

- 유대인과 아랍인 모든 배우들이 있었다. 만약 작품에 담긴 역사적 사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조언도 많이 들었다. 내가 이 작품을 자청해서 제작하겠다고 했을 때는 이미 원작 작가인 존 르 카레 선생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많은 조사와 양측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으니까. 각색을 하면서 훼손될 것이 두려워서 프로덕션을 통해 끊임없이 확인을 많이 받았다.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의 박찬욱 감독과 배우 마이클 섀넌. (사진=(주)왓챠 제공)
▶ 조연급으로 실제 유대인과 아랍인 배우들을 캐스팅한 게 좀 특별하다. 현장에서 더 몰입감있는 장면이 나왔을 거 같은데.

- 아마 프로덕션 입장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런던에서도 그렇게 생긴 배우들을 구하려면 구할 수도 있었다. 캐스팅해서 데려오려면 항공료도 들지만 애초에 캐스팅이 어렵다. 현지 에이전시를 통해 보내 온 오디션 비디오를 검토하고, 화상 통화로 오디션을 또 보고…. 번거로운 과정이 있었지만 최대한 현지 사람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현장에서 만난 그들이 친구가 됐는데 정말 보기 아름다웠다. 연기를 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 '왓챠'라는 인터넷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한국 관객들과 만나게 된 이유가 있을까.

- TV 시리즈 버전은 이미 유럽 여러 나라에서 방송을 했고, 한국 관객은 특별하니까 최상의 버전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감독판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왓챠'가 한국 판권을 사려는 회사들 가운데 가장 높은 액수를 제시했을 때부터 감독판으로 해달라고 애걸복걸을 했었다. 또 하나는 이벤트 상영으로 극장에서 전체 분량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였다. 정말 어려운 부탁이라 간곡히 사정했는데 망설임없이 그렇게 해주더라.

▶ 감독판에 이 장면만은 꼭 넣고 싶었던 부분이 있다면 이야기 해 줄 수 있나.

- 아랍인 테러리스트에게 그들의 형제를 이스라엘 요원들이 어떻게 죽였는지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 때문에 감독판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이스라엘 요원의 태도는 마치 회사원 같다. 당당하면서 약간의 의기양양한 뉘앙스까지 있다. 요원들끼리도 가볍고 사무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건 생명을 어떻게 말살시켰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직업에 몰두하다보면 도덕 관념이 무감각해진다. 이 이야기가 방송판에서는 빠져있다.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의 박찬욱 감독. (사진=(주)왓챠 제공)
▶ 시사회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방송사와의 의견 조율에 있어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제작 기간이나 예산도 촉박했고. 영화보다는 어려운 지점이 많았나.

- 살이 빠진 건 없었는데 머리가 좀 셌다. 각본을 고칠 시간이 너무 부족했고 촬영하면서도 끊임없이 손 봤다. 시간에 쫓긴 게 힘들었다. 또 편집에서의 의견 차이가 있었다. 이것이 프로덕션이나 방송국을 비난하는 말로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은 언제나 있다. 그걸 어떻게 타협하고 조율해 나가느냐가 결국 기술이다. 서로 좋은 생각으로 상대를 설득해 나가는 과정이다. 문제는 시간이 부족해 완전한 조율이 어려웠을 뿐이다. 몇군데에서 타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감독판이 필요했고 다듬을 시간이 주어져서 더 세련된 작품이 됐다.

▶ 각각의 주연 배우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캐스팅됐나. 특히 주인공 찰리 역의 배우 플로렌스 퓨와 어떻게 함께 작업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 젊은 용기와 대담성, 모험성, 호기심 그런 것들을 봤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사랑에 헌신해 뛰어드는, 긍정적인 욕망이 강한 캐릭터는 나도 처음이었다. '리틀 드러머 걸'을 생각하기도 전에 플로렌스 퓨를 처음 만났는데 나중에 좋은 작품이 있으면 함께 하자고 했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이 작품을 같이 하게 된거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유대인스럽지 않게 생겼다는 내부 논란이 있었는데 인종적인 고정관념을 벗어나 캐스팅을 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마이클 섀넌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감독과 영화계가 꿈꾸는 배우이고….

▶ 반복을 지양하고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성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또 구상하고 있는 차기작이 궁금하다.

- 내가 살아온 과정도 그렇고, 현재 사적인 생활도 그렇고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하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특별히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새로운 걸 찾게 되는 것 같다. 안주해서 편안한 상태로 일하는 건 쉽게 지루해진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일을 할 때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하고 자각하거나 그리스 어느 마을에서 눈을 떠서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계속 하는 건 내 그런 개인생활이 너무 단조롭고 평범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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