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②혁명의 거점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고난 |
"해방이라는 고상한 일 하지 말고 어서 기술이나 배워라!"
"니 나이 때는 그런 철학에 빠질 수 있지만 나이 먹으면 다 쓸모없는 얘기다"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 임시정부는 아직 노선을 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렇다고 상해에서 우리의 생활이 편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다 풀어 놓자면 이 중국 땅을 가득 메워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에게 돈이라는 건 곧 생존이다. 월 30원인 임시정부 청사 가옥세도 몇 달째 밀려있다. 동농 김가진 선생의 며느리 정정화 여사가 임정 자금을 구하기 위해 10년 동안이나 국내와 상해를 오갔다. 체포와 죽음의 위험을 감수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정 여사의 지인과 친인척의 돈만으로 임정을 운영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 여사는 "이름, 명예, 긍지보다 급한 것이 생존이다"라며 임정의 경제사정에 한숨 쉬셨다.
안창호 선생도 "돈이 있다면 돈을 내놓는 것, 돈을 버는 것부터가 대한 독립의 시작이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재정에 무관심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안 선생의 말 대로 고국에서 떨어진 이 곳 상해에서 우리를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 이는 없다.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낮에는 전차회사 검표원, 밤에는 임정요원이었다. 검표원을 안 하면 의식주를 해결할 수가 없다.
내 월급은 30원이었다. 이중 10원은 집 세로, 10원은 임정 독립자금으로 나갔다. 결국 남은 건 10원인데 이 월급으로 한달을 사는 것은 여간 힘든일이다.
상해 대부분의 한인은 나같이 전차회사의 검표원으로 일하며 받은 박봉으로 팍팍한 삶을 이어 나갔다.
일부 몰상식한 중국인은 우리를 '망국노'라고 부른다. '나라 잃은 노예들'이란 뜻인데 이런 말을 들을 때 마다 중국인과 충돌이 나기 일쑤였다. 심하면 중국인과 다툼 속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굶주림보다 더 슬픈 것은 나라를 잃은 자존심이었다.
우리더러 '왜 상해에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당초 우리가 상해에 임시정부를 설립한 데에는 호기도 있었지만 합리적 근거들이 있었다.
먼저 신해혁명의 거점도시인 상해는 특성상 혁명적 세력이 많았다. 육로는 멀지만 배를 타면 가장 가까운 것이 상해기도 했다. 베트남, 인도 등 아시아 혁명 세력과도 연락이 편했다. 여기에 우리 청사가 있는 상해 김신부로가 조계 프랑스 지역인 것도 한 몫 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일본이 상해에 있는 프랑스 행정구역에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해는 사실상 사상의 용광로나 다름없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열기는 각지에서 들끓었다. 이들의 열기를 고스란히 반영해 총 8곳에 임시정부가 생겨났고, 그 중 세 곳에 체계를 제대로 갖춘 임시정부들이 수립됐다. 1919년 4월 19일에 설립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고국의 한성에 생긴 한성정부가 그곳이다.
하루는 연해주에 있는 대한국민의회 원세훈 선생은 상해의 임시정부로 찾아와 주요 요인들과 차담을 나누며 "연해주는 정부의 배후가 될 교포가 많고 우리나라 본토와의 거리가 상해보다 가깝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이동휘 선생, 김립 등은 "본토와의 거리만으로 통합의 중심이 될 곳을 정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며 통합에 반대했다.
지리한 통합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 선생이 등장했다. 안 선생은 5월 말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에서 지원받은 지원금을 가지고 상해 의정원으로 왔다. 안창호 선생은 "연해주, 중국, 미국 각지로부터 정식 의정원을 소집해 거기서 주권자 3인을 택한 후 그 셋이 일곱 차관을 뽑아 의정원에 통과 시키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우리를 설득했다.
그는 상해의 안창호, 연해주의 이동휘, 미주의 이승만이 모인다면 통합 가능성이 있겠다고 본 것이다. 안 선생의 의견에 이승만 선생과 이동휘 선생 또한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통합논의가 완료되자 상해 임시정부는 한성정부를 참고해 임시헌법 개정안과 정부 개조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919년 9월 한성, 연해주, 상해를 통합한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결국 신 선생은 격노한 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북경으로 건너가 버렸다.
막 출발한 임시정부의 과제는 분명했다. 독립전쟁을 하겠다는 점에서 전시정부와 비슷하지만 실질적인 군대를 갖지 못했고, 국외에 수립됐다는 점에서 고국 동포들의 지원을 받기가 힘들었다. 한 마디로 가진 것은 없지만 해야 할 것은 산적했다.
그렇게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어느정도 자리를 갖춰가던 어느날 이봉창이란 작자가 상해 임시정부에 들어왔다. 일본인과 흡사한 외모와 동작. 그의 말은 절반이 일어였다. 스스로도 봉창이라는 이름보다는 기노시타 쇼죠가 익숙하다고 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방문한 이유를 이와 같이 설명했지만 우리의 신뢰를 사기는 힘들었다.
가게에서 일을 하며 한국 사람이라고 차별을 받자 아예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죠로 이름까지 바꿨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출신이 대한이라는 주홍글씨는 일본인에서 생활하는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일본 천황의 행차 때 검문 과정에서 한글로 된 쪽지가 이봉창에게서 발견됐다고 일본 순사로부터 호된 고초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이봉창은 기노시타 쇼조도 되지 못했고 될 수도 없는 현실에 개탄해 상해로 들어오게 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의 이 같은 불신에도 김구 선생은 이봉창을 신임했고 1년 동안 공장에서 위장취업 후 대사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이봉창은 의거 직전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슬퍼하는 김구를 향해 "나는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말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요요기 연병장에서 돌아오던 일왕 히로히토를 동경 경시청 앞에서 암살시도 했으나 실패했다. 이봉창은 그해 10월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윤봉길 선생도 거사를 결심한 임정 식구였다.
윤 선생은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고향에서 학교 운영과 계몽운동을 하다가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본인의 신념으로 상해에 당도했다.
그리고 윤선생은 1932년 4월 26일 선서문을 작성 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치를 것을 정식으로 선언했다.
윤봉길 의사 선서문 |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1932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해 중국 내에 있을 기념식 정보를 입수했다. 의거에 투척할 수류탄은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의 도움을 받았다.
마침내 거사당일인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와 자결용 도시락모양 폭탄 1개를 감추고 기념식장에 잠입했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부상을 입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는 중상을 입었다.
윤 선생의 의거에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크게 감화했다. 국민당 주석 장개석 선생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우리를 격찬했다.
하지만 윤봉길 선생의 의거가 긍정적 작용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윤봉길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프랑스 조계당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압박에 굴복한 프랑스 조계당국은 더 이상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보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임정의 안전장치가 사라졌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