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많은 사랑을 주셔서 감사해요"
'라운드 인터뷰'로 진행되다 보니 기자들의 수가 많았다. 인터뷰 전 전혜빈은 기자들의 명함을 받아 자신의 앞에 기자가 앉은 순서대로 놓았다. 그의 작지만 큰 배려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드라마가 좋은 결과를 내며, 모든 배우가 그렇듯 전혜빈도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KBS2 수목드라마 '왜그래 풍상씨'가 높은 시청률은 물론이고 배우들의 호연으로 지난 14일 유종의 미를 거뒀다. 마지막 회는 무려 22.7%라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했다. 10%가 넘기 힘든 변화한 방송환경에서 거둔 값진 결과였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고, 사랑받는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나서 정말 행복해요. 드라마가 끝났음에도 아직도 많은 분이 '너무 잘 봤다', '울면서 봤다', '정상이 때문에 봤다' 등의 피드백을 해주세요. 2019년을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드라마로 시작하니까 배우로서도 든든한 기분이에요. 정말 많은 사랑을 주셔서 감사해요."
동생 바보로 살아온 중년남자 풍상 씨와 등골 브레이커 동생들의 일상과 사건 사고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생각할 기회를 던져준 '왜그래 풍상씨'. 이 드라마에서 전혜빈은 대학병원 의사로 풍상의 자랑이자 마음의 기둥이었다. 풍상의 네 명의 동생 중 이름처럼 '정상'인 인물이었다.
가족의 이야기를 다룸에도 SBS 주말드라마 '조강지처클럽', KBS 주말드라마 '왕가네 식구들' 등 주로 주말극에서 활약한 문영남 작가의 전력 때문에 방송 전은 물론, 방송하는 동안 '현실에서 동떨어진 가족의 이야기', '간 이식 논란' 등 '막장'이라는 꼬리표도 달렸다. 이에 대해 전혜빈은 "답답하고 속상하다"고 밝혔다.
"실은 처음부터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었어요. 풍상, 진상, 정상, 화상, 외상 등 사실 다 우리네 가족 중 한 명은 있을 거 같은 캐릭터예요. 현실에는 누군가의 동생, 아빠, 엄마로 드라마 속 캐릭터가 존재해요. 물론 드라마라서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강렬한 장면을 보인 건 맞아요. 하지만 전 막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처음엔 모두가 피워한 화상이 언니도 그 안에는 아픈 기억과 피해 의식이 있었어요. 풍상이에게 답답하다고, 왜 저렇게 사냐고 했지만, 동생을 키우며 사느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죠."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막장 논란 부분에 대해 "'왜그래 풍상씨'는 무책임한 부모, 바닥까지 감정을 내보이는 형제간의 갈등 등 보통의 범주를 넘어선 막장 같은 현실의 가족관계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며 "영화나 소설도 아닌, 그것도 지상파에서 현실적인 가족 관계를 짚어줬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고들 말한다. 재산을 두고 형제간 다툼 끝에 살인이 일어나기도 하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일은 지금도 일어난다. 어린 시절 가장이 되어 가족을 돌봐야 하는 가슴 아픈 사연도 많다. 풍상이라는 캐릭터는 현실의 답답함 그 자체였다. 드라마에서나마 다른 현실을 보고 싶었던 시청자들은 갑갑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도 힘든 이 현실의 비극들을 더 비극처럼 보이게 만든 건 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인터뷰에서 풍상 역을 맡은 배우 유준상도 '이례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드라마 종영까지도 매회 대본 연습을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다른 드라마 촬영 때보다 NG를 내는 횟수도 적었고, 분량이 많았음에도 촬영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린 촬영 속도도 빠르고 대본도 빨리 나왔어요. 배우들도 NG를 안 냈죠. 대본 연습을 주도한 건 작가 선생님이었어요. 대본 연습을 하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게 모든 배역을 가장 깊게 이해하는 분이었어요. 그리고 어쩜 이렇게 디테일하게 사람의 마음을 깊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놀랐어요. 사실 드라마 찍으면서 캐릭터를 어떻게 하면 잘 표현해낼지 가장 관건이자 고민이에요. ‘왜그래 풍상씨’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가가기도 쉽지 않은데 매회 대본 연습을 하면서 점점 감정이 진해지는 걸 느꼈어요.”
덕분에 전혜빈을 비롯해 모든 배우의 연기가 한층 더 깊어질 수 있었다. 전혜빈은 특히 이미 연기라는 영역에서 한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는 중견 배우들도 더 잘하고자 욕심을 냈다고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전혜빈은 "박인환 선생님(풍상의 장인 간보구 역)도 준비를 진짜 많이 해 오신다. 정말 연기에 욕심을 내셨다"며 "딸(간분실, 신동미 분)을 위해 풍상에게 간을 주겠다며 정상이를 찾아오는 장면이 있다. 연기 인생만 수십 년에 달하는 분이 '같이 연기해서 영광입니다'라는 한마디에 긴장하시더라. 더 잘하고 싶으셔서 그랬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드라마를 단 한 사람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촬영마다 정성을 들여 연기 했다"며 "사실 연기도 연기지만 대사를 틀릴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저도 그렇고 NG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나를 비롯한 모든 배우가 공부하고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기를 통해 더욱더 깊어졌다고 말하는 전혜빈은 사실 가수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이후 배우로 전향해 차근차근 자신만의 길을 닦아왔다. 어느 순간 전혜빈이라는 이름 앞에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먼저 붙게 됐다.
전혜빈은 "이정상이란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제가 피하고 싶은 캐릭터였다. 늘 무뚝뚝하고 차가운 역할을 해 와서 조금은 따뜻하고 재밌는 캐릭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도시적인 이미지의 역할을 많이 해왔다.
'왜그래 풍상씨'에서도 의사 역할을 맡아 열연한 전혜빈은 MBC '캐리어를 끄는 여자'의 변호사 박혜주 역, OCN '라이프 온 마스'의 검사 정서현 역, SBS '조작'의 사진기자 오유경 역, tvN '또 오해영'의 대기업 외식팀 팀장 오해영 역 등 전문직, 합리적인 성격의 소유자 등으로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다.
이러한 모습의 전혜빈도 있지만 KBS '드라마 스페셜-국시집 여자'에서 양산을 들고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논하던 미진은 다른 면에서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미진의 사연 많은 눈빛은 배우의 눈빛이었다. '배우'로서 많은 노력과 고민이 있었기에 지금에 이른 것 아닐까. '왜그래 풍상씨'에서 보인 연기처럼 말이다.
"어렸을 때 가수로 데뷔를 했는데 사실 힘들었어요. 제가 원하는 건 배우였는데, 가수로서 너무 소모적으로 이미지를 다 사용했거든요. 중간에 제 꿈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도 정말 많았어요. 그래서 20대에는 저를 둘러싼 벽을 두껍게 쳐놓고 그 안에 갇혀 지내기도 했어요.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워서 저만의 동굴에 들어가서 안 나오려 하기도 했죠.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까 꾸역꾸역 힘든 상황을 버텼어요.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저를 믿었던 거 같아요. 나를 믿고 내 소신껏 하자고 생각했죠.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하지 말자. 오래 걸려도 하나씩 하나씩 직접 계단을 쌓고 밟고 올라가자고 생각했어요. 고통의 시간이 헛된 시간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앞으로 더 단단하고 뚝심 있게 배우라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토대가 된 거 같아요."
홀로 힘든 시간을 거치며, 홀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며 배우로서도, 전혜빈이라는 개인으로서도 한층 단단해졌다. 배우라는 직업이 화려해 보이지만 매 순간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도 대중의 시선 한가운데 존재하는 만큼 제약도 많은 직업이다. 특히 '여배우'들에게는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게 현실이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제 다리는 튼튼하다고 생각해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 같아요. 고생한 만큼 제가 설 수 있는 힘이 생긴 거 같아요. 그래서인지 뉴스에서 후배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볼 때마다 선배로서 지금 이 순간이 불필요한 시간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자기 자신을 믿고 열심히 나아가다 보면 자기의 시간이 오니까, 그걸 믿고 열심히 하라고 말이죠. 지금 당장 힘들다고 안 좋은 결정을 한다든지 자신을 망치는 일을 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 부분은 보완해 줄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도 빛도 보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물론 이건 아주 나중의 일이고, 아직은 제 꿈이에요."
본인도 어려운 시기를 거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오해도 받으면서 전혜빈은 후배들을 위한 남다른 꿈도 꾸고 있다. 전혜빈은 "이제 겨우 씨앗 하나 심어놓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전혜빈은 먼 훗날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배우로서 더욱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예산 영화도 참여했고 영화 속 작은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찍어 개봉도 예정돼 있는 등 바쁘게 지내왔다. 전혜빈은 드라마도 더 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어느 것보다 '배우'로 인정받고 배우로 사랑받고 싶다고 강조했다. '왜그래 풍상씨'는 전혜빈이 쌓아 올린 또 하나의 돌계단이다. 새롭게 생긴 이 계단을 밟고 하나 더 위로 올라가겠단다.
"제 연기를 좋아해주시고, 많이 궁금해주시고, 지켜봐주는 팬 분들이 생기기 시작한 만큼 더 좋은 연기로 보답해드리고 싶어요. '전혜빈이 나오면 꼭 봐야지'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행운인 거 같아요. 과연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