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항이 기미년(1919년) 만세운동의 거점 지역이자 20년대 대중운동의 광장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개성 호수돈여학교에서 공부하던 조화벽 지사가 독립선언서 필사본을 버선 속에 숨겨 양양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대포항이 개항한 덕분이다.
대포항은 기미 만세 독립운동이 벌어진 1919년보다 10년 전인 1909년 2월 개항했다. 당시는 육로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대부분 사람은 뱃길을 주로 이용했다.
대포항은 37년 동해 북부선이 생기기 전까지 가장 유력한 교통편이었다.
조화벽 지사 역시 육로가 아닌 뱃길을 이용해 대포항으로 들어왔고, 이곳에서 일본경찰들에게 붙잡혔음에도 기지를 발휘해 검문소를 뚫고 들어온다.
만약 대포항이 없었다면 독립선언서 전달은 더 늦어져 조화벽 지사를 주축으로 하는 기독교 세력은 힘을 모으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양양지역은 유림과 기독교 세력, 그리고 청년과 농민이 다 함께 규합하면서 강원 지역 중 가장 치열하게 만세운동이 진행된 곳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대포항은 교통이 발달한 덕분에 식민지하에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집단 거주지였다.
일본 주재소(일제 당시 순사가 머무르며 사무를 맡아보던 경찰의 최일선 기관)도 대포항 근처에 있어 만세운동이 벌어진 기간 군민들은 물치 주재소로 몰려가 일본 경찰들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맞서기도 했다.
속초향토문화원 엄경선 연구위원은 "일제에 의해 만세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기층 민중들, 특히 청년들에 의해 대중운동이 일어나게 된다"며 "1927년 무렵 거의 비슷한 시기에 대포 노동조합과 어민조합 등 두 개 노동조합이 설립됐다"고 설명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저임금으로 어민들을 착취·수탈하며 그 체제를 유지했다. 결국 민중들은 일제의 경제정책에 항거하며 반발에 나섰다. 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반까지 신문에 기록된 파업만 4차례다. 전문가들은 공식적인 기록 외에도 파업이 더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든 문물이 폭주한 대포항. 하지만 대포항은 뒤쪽으로 높은 산이 있어 지형적으로 더는 도시를 팽창하기 힘들어진다. 이에 30년 말부터 건설업자들은 속초항으로 눈을 돌린다.
속초향토문화원 김인섭 사무국장은 "대포항은 단순히 관광중심지가 아니라 양양만세운동의 핵심이자 도화선 역할을 담당한 곳인데 현재 당시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며 "개항 110주년과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대포항을 '기억의 장소'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구체적으로 당시 일제강점기 주재소 자리인 옛 대포항개발사업소 인근에 대포만세운동의 의미를 알리를 표석을 건립하거나 대포의 역사와 변천사를 알릴 수 있는 전시관을 세워 '그날'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