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전개될 항소심 재판에서 일종의 '주도권'을 틀어쥐었다는 의미다.
7일 법원 등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는 전날 이 전 대통령이 청구한 보석을 허가하면서 엄격한 조건을 붙였다.
△주거지를 논현동 사저로 한정하고 외출을 제한 △배우자,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변호인 외에 접견과 통신 제한 △보증금 10억원 △매주 1회 보석 조건 준수 보고서 제출 등이다.
재판부의 보석 조건에 이 전 대통령은 "증거를 인멸할 사람으로 보는 것이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변호를 맡은 강훈 변호사는 "대통령일수록 오해사는 일은 하지 않도록 모범을 보여달라고 조건을 가혹하게 해준 것이라고 이해해달라고 했고 (이 전 대통령이) 이해했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의 일부 참모진은 까다로운 보석 조건을 감수하느니 구속기간이 만료되는 다음 달 8일까지 수감돼 있다가 이후 석방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보석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 전 대통령 측은 보석을 청구한 이유가 건강 문제도 있지만, 도주나 증거인멸 우려가 없기 때문에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방어권을 보장해 달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이를 재판부가 받아들여 보석을 허가한 것 아니냐는 취지다.
검찰이 보석을 강력히 반대하고 전직 대통령 예우 등 불리한 여론을 감수하면서까지 보석을 청구했지만, 허가 결정으로 방어권 보장이라는 명분을 얻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명분뿐만 아니라 항소심 전략을 둘러싼 실리도 챙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전 대통령 측은 자신의 측근들을 증인으로 부르지 않은 1심과 달리 항소심에서 적극적으로 증인을 불러 검찰 조사 과정에서 이들이 내놓은 진술의 신빙성을 다투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하지만 핵심 증인들이 출석을 거부하면서 증인신문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재판은 공전했다. 재판부가 채택한 증인 15명 중 3명만 증인신문이 진행됐고, 증인 대부분은 연락 두절로 소환장 전달도 안 됐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부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재판으로 중요성과 인지도를 고려할 때 소환장이 송달되지 않은 증인들에 대해서는 서울고법 홈페이지에 이름과 증인신문 기일을 공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출석하지 않는 증인은 정당한 사유 없이 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재판부 직권으로 구인을 위한 구속영장을 발부할 예정"이라고 공언했다.
재판부는 검찰을 향해서도 "핵심 증인으로 볼 수 있는 몇몇 사람은 자신들이 증인으로 소환된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회피하는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있다"며 "검찰도 소재 파악을 통해 제때 신문이 이뤄지도록 협조해달라"고 당부했다.
이 때문에 지지부진했던 항소심 심리가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 측 입장에서 볼 때 항소심 심리 속도는 이제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전 대통령은 비록 주거와 통신 등 엄격한 제한을 받아 자택구금 상태로 풀려났지만, 항소심 재판을 서두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재판부의 적극적인 증인 소환으로 핵심 증인들이 법정에 나온다면 그들이 수사과정에서 내놓은 진술을 깨는 데 집중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설사 핵심 증인들이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증인신문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충실한 심리를 강조할 수도 있다.
증인신문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심리미진 등을 이유로 재판부를 압박할 카드마저 쥘 수 있는 셈이다.
강 변호사는 "보석이 허가돼 저희 입장에서 매일 구치소에 가서 접견하는 부담도 적어졌고, 이 전 대통령도 마음 편하게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살릴 여유를 가지게 됐다"며 "대통령의 방어권을 위해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