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농사 20년에 산지폐기 악순환 고리는 못 끊어"

[농작물 산지폐기의 악순환, 대수술이 필요하다]
③배추 농사 20년 지은 해남 농민의 한숨
2014년 풍년 때보다 올해 상황 더 심각
배추 농사 20년 지었는데도 반복되는 산지폐기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농작물 수급조절에 실패 '거듭'

농민 주기상씨가 산지폐기를 위해 트랙터로 작업을 한 뒤 종잇장처럼 찢겨진 배춧잎을 살펴보고 있다.(사진=광주 CBS 조시영 기자)

올 겨울 날씨가 유난히 따뜻해 배추 등 동절기 농작물이 유례 없는 풍년을 맞았다. 지난해 가을부터 밭에 물과 비료를 대며 정성을 드린 농민들은 값진 결실을 맺었다. 적정한 강수량과 따뜻한 기온에 농민들의 노력이 맞물려 같은 면적이라도 평소 보다 50% 넘는 작황을 보인 농가도 있을 정도로 풍년이다.

하지만 농촌 들녘에서 풍년을 맞이하는 농민들의 마음은 전혀 즐겁지 않고 오히려 답답할 뿐이다. 이른바 '풍년의 역설'이 불러온 풍경이다. 풍년이 들면서 농작물 공급량이 대폭 늘었지만 소비량은 오히려 줄면서 농작물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그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린 농민 주기상(58)씨. 주 씨는 전남 해남군 산이면에서 배추, 고구마 등 다양한 채소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배추 농사는 벌써 20년을 넘겼다. 해남 배추밭 산지폐기 현장에서 주 씨를 만났다.

주 씨는 "4년 전인 2014년 겨울배추 풍년이 들었지만 수급조절에 실패해 자식같은 농작물을 갈아엎어야 했던 그 때의 악몽이 또다시 재현되고 있다"고 말을 꺼냈다. 그는 "어느 한 쪽에서는 농산물이 부족하다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농산물을 수입해서 먹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고 하소연했다.

주 씨는 30년 전 벼농사로 처음 농작물 재배를 시작했다. 이후 풍년과 흉년의 순환 속에 품목을 다양화하지 않으면 농사짓기 어렵다고 생각해 20여년 전 배추농사를 시작했다. 배추 외에도 고구마와 콩, 딸기 등으로도 품목을 다양화했다. 그런 그가 자식과도 같은 농산물을 4년 만에 또 다시 산지 폐기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주 씨는 "배추 밭 1만평 가운데 3차 산지폐기를 통해 1천 평을 갈아 엎었는데 그나마 일부 생산비라도 건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며 "현재 정부가 수급조절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산지 폐기는 이듬해 농사를 이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생협과 1천 평은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제 남은 배추밭이 8천 평 정도다"며 "4차 산지폐기가 어느 정도 이뤄질지 모르지만 상당수 배추는 손해보고 팔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고 답단한 심정을 토로했다.

주 씨는 올해 상황이 산지폐기가 대대적으로 이뤄진 2014년 보다 더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전년의 경우 배추 1포기가 1.5㎏ 정도 였는데 대풍년이었던 4년 전에는 배추 1포기에 3㎏를 넘는 것도 많았다"며 "올해는 작황이 좋은 것은 맞지만 4년 전 수준까진 아니다"고 했다. 주 씨는 "그렇지만 4년 전 보다 전체적인 배추 재배면적이 늘고 소비량은 줄어 상황이 더 심각하다"며 "산지폐기량도 4년 보다 훨씬 증가할 것이다"고 전망했다.

주 씨는 유례 없이 따뜻한 기온에 올 11월과 12월 작물 성장기를 맞아 예년보다 강수량도 좋았던 것을 올 겨울 작황이 좋은 이유로 들었다. 주 씨는 "올 겨울에는 초기 작황이 너무 좋아 예년보다 두 배 정도 무게가 나가는 배추가 있을 정도다"며 "최근 몇년 동안 수급 조절이 맞아 떨어진 것은 정부가 예측을 잘해서라기 보다는 기후 때문에 작황이 좋지 않아서였다"고 꼬집었다.

올해의 경우 주 씨의 이야기처럼 작황이 좋다보니 배추 재배면적과 관계없이 배추 물량이 쏟아졌다. 전국적으로 가을배추는 전년보다 재배 면적이 2.6% 줄고 겨울 배추도 1.6% 줄었다. 그럼에도 지난해와 달리 생산량이 20% 증가해 가격이 폭락했다. 실제로 농가가 체감하는 생산량 증가는 20%를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농민 주기상씨가 산지폐기를 위해 트랙터로 작업을 한 뒤 종잇장처럼 찢겨진 배춧잎을 살펴보고 있다.(사진=광주 CBS 조시영 기자)
주 씨는 남은 물량이 더 걱정이다. 가격이 올라야 하는데 좀처럼 가격이 안정세를 찾지 못하고 있어서다. 주 씨는 "현재 배추 12포기에 4천원 정도에 거래되는데, 이 정도로는 농사비용은 차지하고 수확해서 포장하는 비용도 나오지 않는다"며 "못해도 7천원에는 거래돼야 시장에 내놓을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고 말했다.

주 씨는 4차 산지폐기에도 물량이 소화되지 않으면 자체 폐기할까도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배추 출하를 하지 않고 밭에서 자체 폐기하는 비용도 100평당 5만원 정도 소요된다. 가격 하락에 따른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시장에 출하하면 최소한 자체 폐기 비용은 충당할 수 있기 때문에 주 씨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주 씨는 농협과의 계약재배와 상인들에 의한 포전 거래 이른바 '밭뙈기' 등에 대한 의견도 스스럼 없이 밝혔다. 주 씨는 "농협과 이뤄지고 있는 계약 가격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며 "그마저도 농협에서 소화할 수 있는 물량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그러다보니 수급조절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지금 산지 폐기는 농협에서 맡아서 하고 있는데, 농협과 계약재배를 안 한 물량이 훨씬 많다"고 덧붙였다.

일방적인 계약 파기 문제도 제기했다. 주 씨는 "지금 포전거래를 하는 상인들의 계약 이행률이 절반도 안 될 것이다"며 "농작물 가격이 폭락하면 상인들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고 나 몰라라 하는 게 농촌의 현실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농협도 직접 나서서 유통을 해야 하는데 사실은 농협이 직접 나서지 않고 대부분의 물량을 상인들에게 떠넘긴다"며 유통과정의 구조적 문제점을 꼬집었다.

주 씨는 누구보다도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 생산을 위해 무농약 재배를 포함해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해 배추농사를 짓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갈수록 농작물 생산 여건이 나빠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농작물 수급 조절과 관련해 정부와 지자체, 농협 등 관계기관의 대책이 20년 전과 비교해 그다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란 게 그의 주장이다. 주 씨는 "정부가 수급 조절을 지금의 면적 단위로 하는 것은 올해의 사례를 보듯이 한계가 있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일기인데, 일기에 따라서 같은 면적이라도 생산량은 천차만별이다"고 했다. 그는 '날씨를 읽을 줄 알면 농사꾼은 돈을 번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며 "산지폐기가 대대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4~5년마다 반복되고 있는데 이제는 정부에서 땜질 처방이 아닌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남 해남에서 20년째 배추 농사를 지어온 농민 주기상 씨는 배추 수급 조절 실패로 수 년 마다 반복되는 배추밭 갈아엎기의 악순환을 뾰족한 대책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픔을 겪어왔다.

광주CBS의 기획보도 <농작물 산지폐기의 악순환, 대수술이 필요하다>

세 번째 순서로 배추 주산지인 전남 해남에서 배추 농사를 20년 이상 지어온 농민 주기상 씨의 애환에 대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풍년의 역설-'배추 주산지' 해남 산지폐기 현장을 가다
②땜질식 처방 '산지폐기' 전국 각지에서 일상화
③배추 농사 20년 지은 해남 농민의 한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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