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 '선 비핵화 후 배신'…이유 있는 불안

공정가격 없는 비핵화 거래도 어렵지만 핵심은 신뢰…회담결렬에 北경계심 커질듯

(사진=연합뉴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국제미디어센터 근처 한 쌀국수 집 메뉴판에는 어찌 된 일인지 가격이 적혀있지 않았다.

비싼 음식도 아니고 무엇보다 바빴기 때문에 설마 하고 주문했다가 아니나 다를까 바가지를 썼다.

짧은 영어로 따져봤지만 못 알아듣는 건지 그런 척 하는 건지 통하지가 않았다. 액수는 크지 않았지만, 잘 먹은 쌀국수 뒷맛이 썼다.

북미정상회담 결렬 과정을 되짚어 보다 떠오른 생각 중 하나는 엉뚱하게도 그 쌀국수 집이었다.

따지고 보면 북핵협상의 가장 큰 어려움은 가격표가 없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번 경우처럼 영변 핵시설이 얼마짜리인지 공인된 가격 따위는 없으니 북한은 높여 부르고 미국은 낮춰 부르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

하지만 가격표가 없다고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격이야 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문제는 신뢰다. 가격 뿐 아니라 거래 조건까지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돈은 나중에 줄 테니 물건부터 보내라는 방식은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인 후에나 가능하다.

영화 속 악당들이 마약이나 무기를 거래할 때 현금과 동시에 교환하는 것은 악당이어서가 아니라 신용관계가 제로(0)여서다.

쌀국수 한 그릇도 신뢰가 없다면 찜찜한 법인데 하물며 북핵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은 이번 협상에서 영변 뿐 아니라 '플러스 알파'를 요구했다. 영변 외의 우라늄 농축시설이나 대량살상무기(WMD) 동결 등도 포함시키라는 것이다.

북한 입장에선 영변의 비중은 차치하고라도 WMD 동결 등은 현 단계에서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다.

WMD는 협상의 최후 보루인 '과거 핵'에 해당된다. 말이 동결이지 사실상 공격 리스트 제출로 간주할 수 있다. 동결에는 검증이 따르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선 '선 비핵화 후 배신' 가능성을 더욱 경계하는 계기가 됐을 것 같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생각이 좀 달라지시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북한은 미국의 말을 믿고 핵을 포기했다 비참한 최후를 당한 리비아의 카다피 사례를 우려하고 있다.

사실 이번 회담이 그에게는 이미 미국의 '작은 배신'일 수 있다. 여러 정황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이 합의 불발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어렵게 공감대를 이룬 동시적·단계적 해법을 단 번에 뒤집고 사실상 '선 비핵화'를 요구한 것 자체가 협상 원칙을 배신한 셈이기도 하다.

신뢰를 쌓기는 어렵지만 잃는 것은 한 순간이다. 두 나라처럼 70년 적대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이번 회담 결렬이 남긴 교훈이 있다면 이것이다.

※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 노컷뉴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를 가감 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 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 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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