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제재 이견, 美 "다 풀어주란 건가"…北 "이미 풀렸어야"
지난달 28일 북미정상회담 둘째 날, 오전의 확대회담이 예정보다 1시간 30분정도 길어진 끝에 오찬과 서명식이 갑작스레 취소됐고, 결국 북미정상회담은 합의문 없이 결렬됐다.
그 뒤, 북미는 각자 기자회견을 열고, 향후 대화를 지속할 것이라 밝히면서도 회담이 결렬된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시켰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오후 2시 15분쯤(현지시간) 숙소 JW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이 영변을 비롯한 "핵 프로그램 상당수를 비핵화할 준비가 돼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그렇다고 미국이 전면적 제재 해제는 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고 강조했다.
앞서 미국은 완전한 비핵화에 이를 때까지 제재를 유지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만으로는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 수준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추가적인 고농축 우라늄 시설, 핵탄두 무기 시스템, 핵 목록 신고 등 비핵화 조치가 필요했지만, 북한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북한도 약 10시간이 지난 1일 0시 15분쯤 김정은 위원장의 숙소인 멜리아 호텔 1층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나선 리용호 외무상은 "우리가 요구한 것은 전면적인 제재 해제가 아니라 일부 해제였다"며 "구체적으로 유엔 제재 결의 11건 중 2016년과 2017년에 채택된 5건, 그중에서 민수경제와 인민 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리 외무상이 언급한 5건의 제재는 북한의 석탄, 철, 철광 수출을 금지하는 결의안(유엔 안보리 결의 2270호·2321호·2371호)과 유류 공급을 감축시키고 대북투자 및 합작사업을 금지시킨 결의안(2375호) 및 정유 제품 공급량을 연간 50만 배럴로 감축하고 북한의 해외노동자를 본국으로 귀환 시키라는 결의안(2397호)이다.
리 외무상은 영변 핵폐기와 함께 "우리는 미국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해 핵 시험과 장거리 로켓 시험 발사를 영구적 중지한다는 확약도 문서형태로 풀 용의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이 영변지구 핵폐기조치 외에 한 가지 더 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제안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다"며 결렬 이유를 설명했다.
'일부 완화'와 '전면적 완화'를 둘러싼 진실게임은 북미 서로의 반박과 재반박을 거치며 가중됐다. 하지만 문제는 서로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인식 자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북한은 자신들이 이미 15개월째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시험을 중단하고 있기 때문에 대북제재가 지속될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유엔 안보리 결의의 원인이 된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시험이 사라졌으므로 제재도 해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핵심 핵시설인 영변의 폐기를 미국 전문가를 초청해 '깨끗하게'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민생과 민수관련 일부 제재를 풀어주지도 않을뿐더러 추가적인 핵 관련 시설의 폐기를 요청했다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미국은 15개월 간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시험 중단이 비핵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물론 대량살상 무기의 위협이 상존하기에 이에 대한 조치가 없이는 대가를 제공할 수 없다.
게다가 미국은 북한이 제공한 민생과 민수 관련 제재의 해제는 사실상 모든 대북제재의 해제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미 정부 고위관계자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현시점에서 그들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동결을 꺼리고 있기에 제재 완화로 수십억 달러를 주면 사실상 현재 진행 중인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보조금을 주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말했다.
회담 결렬 이후 트럼프 대통령과 리용호 외무상의 기자회견, 그리고 다시 이어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반박과 최선희 외무상 부상의 재반박까지 복잡하게 이어졌지만, 다행스러운 점은 모두 대화를 조만간 재개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점이다.
다만 북한의 뉘앙스는 약간 다르다. 최선희 외무상 부상은 지난 1일 오후(현지시간) 하노이 멜리아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회담에서 미국 측이 굉장히 사리에 맞지 않았다"며 "(김 위원장의) 신년사로부터 시작해 상응조치 없으면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입장을 표시했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뭐가 되고 뭔가 돼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지난 1월 신년사에서 나온 '새로운 길 모색 발언'이 재등장한 것이다.
당시 김 위원장의 신년사는 한반도 비핵화 및 대미 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메시지가 주를 이뤘다. 다만,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그 무엇을 강요하려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에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리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번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자신들이 제안한 내용이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북한이 다시금 새로운 길을 꺼내든 것은 미국이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핵 활동을 재개하겠다는 뉘앙스로 읽힌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주민들을 향해 비핵화를 수차례 공언해왔기 때문에 다른 길을 통해 비핵화와 경제개발을 이룩하는 방식을 택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여권 관계자는 "북한이 말하는 새로운 길은 중국과의 밀착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경제 개발의 활로를 중국에서 찾고, 국제사회 여론전을 펼쳐 대북제재 해제를 노릴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회담 결렬 이후 북-러시아 정상회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 역시 북한이 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활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보다는 추후 협상이 재개될 경우 유리한 고지를 잡기 위한 북한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이 될 가능성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