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다수에게 빠르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당시 뉴미디어였던 라디오 방송을 주기적으로 국내외에 송출했다.
◇ 임시정부 독립투쟁·일본군 패전 전황 생생하게
옥상의 안테나와 대형 스크린만이 이곳이 한때 방송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을 만난 방송국 관계자는 "현재는 교육센터가 들어왔고 제작 기능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고 했다.
그의 아들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은 "아버지가 직접 쓴 원고를 날더러 교정을 보라고 했고, 때로는 아버지가 문장을 불러 주면 받아 적기도 했다"며 "경우에 따라 이런 문장은 이렇게 고치면 어떻냐고 건의하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김 회장과 이화여대 사학과 정병준 교수 등에 따르면 방송에는 주로 임시정부 독립투쟁과 일본군 패전 전황 등이 담겼다. 독립군이 전투에서 올린 전과로 중국 장제스(蔣介石) 주석이 지원을 약속했다는 내용도 나왔다.
방송은 한 번에 30분씩 진행됐으며 초기에는 주 1차례(목)만 진행하다 이후 3차례(월·수·금)로 확대된 것으로 전해졌다.
◇ "학병들, 일본군 탈출해 광복군 품으로 오라"
임시정부뿐 아니라 그 산하에 있던 한국광복군에서도 같은 곳에서 직접 방송을 진행했다. 광복군 총사령부 심리전연구실 주도로 일본 점령 지역을 상대로 하는 이른바 대적방송(對敵放送)을 한 것이다.
이 관장은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학병에게 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오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라며 "음악소녀의 꿈을 갖고 있던 어머니가 우리 동포 청년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데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일제 패색 짙어지던 때 "라디오 방송이 희망을 줬다"
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와 국제 정세 등에 관한 소식이 국내로 퍼지자 일제는 방송 청취를 엄격하게 단속했다.
실제로 1942년 말부터 단파방송을 몰래 들었다는 혐의로 경성방송국(현 KBS) 직원 40여명 등 모두 150여명이 검거됐고, 관련자들은 실형 또는 벌금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병준 교수는 "국내 독립운동가들이 단파방송을 듣고 이를 대대적으로 확산시켜 일제의 후방 안정과 총동원체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줬다"며 "국내 지도자들에게 충칭 임시정부가 연합국과 연대해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배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부각했다"고 밝혔다.
이준식 관장은 "방송이 일제 말 이를 듣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남겼다는 점은 분명하다"며 "일제가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거짓 선전을 하던 시절 실제론 일본이 패망한다는 희망을 품게 했고,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 선언을 했을 때 제일 먼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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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을 들었고, 정세를 읽었다. 임시정부에 모인 선열들은 목숨을 내걸고 자주독립을 그렸다. 주권회복 과정이 일제 패망이라는 외적 요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다. CBS노컷뉴스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충칭과 시안을 찾아 광복군의 피와 땀을 추적한다. [편집자 주] ① 광복군 '국내침투' 비밀 훈련장, 절벽에 메아리가 쳤다 ② 대륙을 흔든 독립운동, '광복군 오페라' 아리랑 ③ 중국에 '독립 노력' 약속 받아낸 터, 최초 확인 ④ "여기는 충칭, 동포들 듣고있나"…임시정부 라디오방송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