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치됐던 군사위, 호텔 회의장으로
중국 충칭시(重庆市) 위중구(渝中区) 해방서로(解放西路) 66호. 70년 전 국민당 군사위원회로 쓰였던 건물 외벽에는 최근 노란 페인트가 싹 칠해졌다. 녹슬고 칠이 벗겨진 채 방치됐던 이곳은 호텔 회의장으로 쓰기 위한 단장이 한창이다.
호텔 측 협조로 잠겨 있던 현관을 열고 내부에 진입했다. 1층 천장을 뚫고 2층 바닥을 뜯어 천장이 높은 원룸 회의장이 됐다. 조명을 켜보니 흰색 커버가 씌워진 의자가 연단 쪽을 향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빌딩을 호텔이 인수했다고 한다. 최근까지는 가림막도 쳐져 있었다. 호텔 관계자는 "군사위원회는 새로 복원한 게 아니라 과거에 실제로 썼던 곳으로 알고 있다"며 "장제스(蔣介石)가 마오쩌둥(毛澤東)과 만났던 곳이라고는 알고 있는데 한국 역사와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1943년 7월 26일 오전 9시. 이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들이 찾아왔다. 김구 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김규식 선전부장,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 김원봉 부사령, 그리고 통역을 맡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원생은 2층 접견실로 올랐다. 그곳에서 중국 최고 통치자인 장제스 군사위원장을 만났다. 그가 미국 측과 2차 대전 전후 재편에 관한 회의를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우리 쪽에서 긴급하게 요청한 만남이었다.
그 무렵 임시정부에서 생활했던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은 지난 22일 CBS노컷뉴스 취재진을 만나 "장제스는 중국에서 신 같은 존재였고 우리는 곁다리로 거기서 얻어먹고 사는 처지에 '만납시다' 하고 함부로 얘기는 못했을 것"이라며 "김구 선생과 이청천 장군이 어렵게 해서 만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장제스 위원장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을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난 건 그로부터 넉달 뒤인 43년 11월 말이었다. 당시 장제스는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해 미국의 동의를 얻어냈지만 식민지 인도 문제를 염려한 영국 측과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중국 측 실무자 왕충후이(王寵惠) 국방최고위원회 비서장이 일지에 적었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정을 거친 카이로선언 최종 합의문에는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한다"라고 적혔다. 조건부였지만, 연합국들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것이다.
◇ "신탁통치 반대" 기자회견까지
외무부장 조소앙은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은 그 즉시 독립돼야 하며 외세 간섭이나 통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통해 "국제공동관리가 실시되면 지난 30년 동안 일제에 혈전을 전개했던 것처럼 열강들에 대해서도 끝까지 저항하겠다"고 밝혔다.
전후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선언이, 임시정부가 거둔 외교적 성과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조건부였지만 2차대전 중 열강이 국제회의에서 독립을 보장한 약소국은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카이로선언 발표 당일 김구 주석은 "나의 유쾌는(기쁨을) 형언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독립기념관 이준식 관장은 "연합국 지위를 확보하려 했던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노력은 비록 실현되지 못했지만 카이로선언의 독립 약속으로 빛을 발했다"며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고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할 수 있던 것도 그런 노력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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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을 들었고, 정세를 읽었다. 임시정부에 모인 선열들은 목숨을 내걸고 자주독립을 그렸다. 주권회복 과정이 일제 패망이라는 외적 요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다. CBS노컷뉴스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충칭과 시안을 찾아 광복군의 피와 땀을 추적한다. [편집자 주] ① 광복군 '국내침투' 비밀 훈련장, 절벽에 메아리가 쳤다 ② 대륙을 흔든 독립운동, '광복군 오페라' 아리랑 ③ 중국에 '독립 노력' 약속 받아낸 터, 최초 확인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