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광복군 '국내침투' 비밀 훈련장, 절벽에 메아리가 쳤다 ② 대륙을 흔든 독립운동, '광복군 오페라' 아리랑 (계속) |
◇ 선풍적 인기에 첫 공연 열흘 내내 만석
한때 시안의 중심가였던 이곳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주최한 창작 가극 '아리랑'의 첫 무대가 꾸며진 건 1940년 5월. 연극과 노래를 합친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 즉 오페라 형식이었다. 선풍적 인기에 '남원문 실험극장(南院門 實驗劇場)'은 열흘 내내 만석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연은 아리랑 고개에 살던 한국인 부부가 일제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무장독립운동을 벌인다는 내용이 담겼다. 극중에서 부부는 장렬히 전사하지만 끝내 태극기는 다시 아리랑 고개 위에서 나부낀다.
당시 현지 언론 '서경일보'와 전지공작대 기관지 '한국 청년' 등에 따르면, 수익금 전액은 전방의 한·중 장병들에게 보내져 여름 전투복을 마련하는 데 사용됐다.
다음해 초 전지공작대가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에 합류한 뒤에도 광복군 이름을 내건 공연이 계속됐다. 이때는 3·1절을 기념하거나 전쟁고아를 돕기 위한 목적이었다.
◇ 광복군 선전대장 한유한 "음악으로 구국"
지난 1915년 가족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여느 한인 학생들처럼 '망국노'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나라를 뺏긴 노예'라는 뜻이다.
그러다 전공을 살려 음악으로 하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때부터 형석이라는 본명 대신 '조국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유한(悠韓)이라는 이름을 썼다. '광복군가', '압록강 행진곡', '조국 행진곡' 등 군가도 작곡했다.
◇ "공연 본 뒤 한국에 공감했다"
시안에서 광복군을 연구하는 푸위안(蒲元) 교수는 "현지 사정에 맞게끔 오페라의 이야기 구조와 무대가 완벽하게 짜여 있었다"며 "중국 사람들도 이 공연을 보고 한국을 이해하고, 본인들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인들이 그런 모든 것을 알고 나니 한국에 대한 동정심과 함께 믿음과 지지가 생겼고, 효과를 거두었다"며 "아리랑은 항일전쟁 시기의 극 속에서 빛나는 진주 같은 보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당시 임시정부가 군사·재정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던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공조를 강화하는 데도 한몫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공연 이후 한 선생은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군사위원장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에게 섬서제2보육원 아동예술반 지휘자로 임명됐다. 이 활동을 통해 광복군은 중국의 각 기관과 더욱 협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단국대 양지선 연구교수는 "한 선생이 무기 대신 예술로 적과 싸워 이룬 유무형 자산은 한·중 연대를 성사시켜 실질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했다"며 "문화예술 자체뿐 아니라 독립운동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효용과 가치를 지닌다"고 밝혔다.
※ 이 기사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부터 감수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