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1주년' 격동의 韓 체육과 하향 평준화의 함정

9일 오후 강원도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KOREA' 피켓과 한반도기를 앞세운 남북 선수들이 공동입장하고 있다. 기수는 한국 봅슬레이 간판 원윤종과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의 북한 수비수 황충금. 이한형기자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인 2018년 2월 9일은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사상 첫 동계올림픽의 화려한 막이 오른 날이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날이었다.

1988년 한국 역사 최초의 하계올림픽인 서울 대회를 치른 데 이어 꼭 30년 만에 역시 한국 최초의 동계올림픽을 열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8번째로 동하계 올림픽을 모두 치른 국가가 됐다. 스포츠 강국으로서 위상을 확인한 셈이었다.


대회도 성공적이었다. 전 세계 92개국, 2920명 선수들이 출전해 102개의 금메달을 놓고 경쟁한 역대 최대 규모 동계올림픽이었다. 남북한의 개회식 동반 입장과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등 평화적 메시지도 전 세계에 전했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역대 최고의 대회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 선수단의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금메달 8개, 은메달 4개, 동메달 8개로 종합 4위를 이루겠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금메달 5개 등 종합 7위로 아시아 최고 성적을 냈다. 특히 스켈레톤과 봅슬레이 등 썰매와 컬링, 스키 스노보드에서 사상 첫 메달이 나오는 등 역대 최다인 6개 종목에서 17개 메달을 수확하며 빙상에 집중된 메달밭의 다변화를 이뤘다.

16일 오후 강원도 평창군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남자 스켈레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대한민국 윤성빈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이한형 기자
하지만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꼭 1년이 지난 2019년 2월 9일 한국 동계스포츠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개최국으로서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과 전폭적인 지원 속에 꽃을 피우는 듯했던 한국 동계스포츠는 또 다시 고전했던 옛날로 돌아갈 위기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이 다시 재현되는 모양새다. 스켈레톤 윤성빈이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썰매 종목 대표팀은 1년 만에 훈련장을 잃었다. 올림픽이 열렸던 평창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는 예산 부족으로 얼음을 유지할 지원도 얻지 못해 대표팀 훈련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훈련뿐 아니라 올림픽 유산까지 사라질 위기다. 슬라이딩센터는 물론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 강릉 하키센터도 운영 주체를 찾지 못해 향후 활용 방안이 불투명하다. 이승훈이 매스스타트 최초의 챔피언에 오른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은 한때 냉동 창고로 쓰일 수 있다는 황당한 얘기가 나온 적도 있다. 하키센터는 역사적인 사상 첫 올림픽 남북 단일팀인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이 뛰었던 장소였다.

일단 대회를 개최한 강원도는 재단을 만들어 이들 시설을 운영한다는 방침이지만 쉽지 않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지난 7일 기자 간담회에서 "시설에 대한 운영 주체가 오는 3월 말에 결정된다"면서 "아마도 문화체육관광부와 강원도, 시군, 대한체육회 등에서 공동으로 평창올림픽 기념재단이 만들면 운영 주체가 결정될 것이지만 예산 출연 등 논의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밝혔다. 1000억 원 이상이 들 재단 예산부터 문제다.

여기에 평창올림픽은 기존 엘리트 스포츠 운영 방식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대회이기도 했다. 성적 지상주의에 매몰돼 폭행과 폭언, 심지어 성폭행까지 선수들의 인권이 무시된 그늘이 폭로됐던 것이다. 물론 이는 향후 한국 스포츠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대회 전부터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장거리 베테랑 노선영이 대표팀의 특혜 논란을 폭로하면서 문제점이 불거졌다. 성적이 좋은 일부 선수들 위주로 대표팀이 운영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노선영은 대회 중 여자 팀 추월에서 이른바 '왕따 주행'의 피해자로 여겨지면서 일부 선수들에 대한 비난이 극에 달했다.

21일 강릉 오벌 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7,8위전을 마친 노선영과 김보름이 경기장을 떠나고 있다. 이한형 기자
또 뒤늦게 쇼트트랙 여자 대표 심석희가 조재범 전 코치로부터 폭행을 넘어 성폭행까지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한국 체육계는 발칵 뒤집혔다. 평창올림픽을 한 달 앞둔 상황에서도 폭행과 성폭력이 이뤄졌다는 심석희의 주장은 성적 지상주의에 대한 경종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체육계 전체의 미투 운동으로 번지면서 선수들의 인권이 존중돼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다만 이런 움직임은 반드시 경계해야 할 점도 분명하다는 의견이다. 선수들의 인권은 분명히 존중돼야 하나 대부분 국가대표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까지 저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향후 국가대표들의 기량이 하향 평준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는 게 사실이다. 국민들의 소중한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대표 선수단이 자칫 의무는 소홀히 한 채 권리만을 찾는다면 이 역시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왕따 논란'의 두 주인공인 노선영과 김보름의 주장이 엇갈리는 점이다. 노선영은 올림픽 전부터 김보름 등 일부 선수들이 국가대표 태릉빙상장이 아닌 한체대 빙상장에서 따로 훈련하는 특혜를 누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메달이 유력한 매스스타트 종목에 유리한 쇼트트랙 훈련을 위해 최대 1000만 원이 넘는 국가대표 훈련 수당을 포기하면서까지 촌외 훈련을 택했다.

태릉의 쇼트트랙 빙상장은 피겨 스케이팅 등 일반인들의 일정까지 빡빡해 훈련이 쉽지 않은 상황. 결국 김보름과 이승훈 등은 한체대 훈련으로 올림픽에서 은메달과 금메달을 따내며 결실을 거뒀다. 노선영은 김보름 등이 자신과 함께 출전하는 팀 추월 훈련에 집중하지 않았다고 서운함을 드러냈지만 기록상 메달이 사실상 불가능한 종목이었다. 자신의 마지막 올림픽을 의미있게 뛰고 싶었다는 노선영을 위해 김보름이 메달이 유력한 매스스타트 훈련을 포기하고 팀 추월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였다.

이런 둘의 갈등은 최근 불거진 체육계 폭력 논란까지 닿았다. 김보름이 모 언론과 인터뷰에서 노선영을 지칭하진 않았지만 선배로부터 가혹 행위와 폭언을 당해왔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노선영은 또 다른 매체를 통해 이를 부인했지만 둘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 대목이다. 사실 대학(한체대)과 실업팀(강원도청), 국가대표팀에서 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은 빙상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물론 대표팀 내 불화와 갈등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다. 심석희의 경우도 이번 폭로를 통해 쉬쉬해왔던 쇼트트랙 대표팀 내 특정 선수와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났다.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스포츠에서 이런 갈등 역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 심석희(21·한국체대)가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조재범 전 국가대표팀 코치의 항소심 2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하지만 정정당당한 선의의 경쟁을 거친 성과까지 단순한 감정의 골이나 파벌 싸움 등으로 공격을 받는다면 또 다른 문제다.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선수들은 치열한 선발전을 거친다. 더 나아가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겨루는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려면 더욱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메달에 눈이 멀어 일부 지도자들이 폭력 등의 일탈된 행동을 벌이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선수들의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게 메달이다. 세계를 제패하고 사실상의 올림픽 2연패를 이룬 '피겨 여왕' 김연아도 타고난 재능 속에 피눈물로 점철된 훈련을 이겨내고 핀 꽃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수들의 자발적 의지다. 지도자 등 타의에 의한 맹목적 훈련은 폭언과 폭력 등 강제적인 수단이 따를 수밖에 없고, 선수들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선수들이 자신의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땀 흘리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다.

그런 노력이 지도자와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한 국가대표 출신 지도자는 "요즘은 어린 선수들에게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서 "이런 분위기가 진심으로 지도하려는 지도자들의 마음과 선수들이 스스로 힘든 훈련을 이겨내려는 의지까지 꺾는다면 오히려 문제가 될 것"이라고 걱정을 드러냈다.

이런 점에서 오는 2020년 도쿄올림픽과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은 한국 스포츠에 굉장히 중요한 대회가 될 전망이다. 강압적인 분위기를 벗어나 즐기는 스포츠로서 변화를 꾀하는 한국 체육계에 사실상 첫 메이저 대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두 대회를 개최하는 일본과 중국은 한국이 포기하려고 하는 합숙 등 강훈련으로 성적을 내기 위해 의욕을 보이고 있어 좋은 비교가 될 전망이다. 평창올림픽 이후 격동의 1년 속에 기로에 놓인 한국 체육계, 과연 스포츠 강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도약이 이뤄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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