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틀어 올려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은 머리, 검은색을 기본으로 채도 조절만 하는 어두운 계열의 옷,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니다' 말투, 좀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빛, 표정 없는 얼굴. 서울대 입학사정관 출신의 탑급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은 JTBC 금토드라마 'SKY 캐슬'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 중 하나였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꿈의 숫자로 보였던 시청률 20%를 넘겨, 비지상파 최고 시청률을 새로 쓴 'SKY 캐슬'은 명실상부한 요즘 최고의 히트작이다. 목표한 대학에 합격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얼핏 보면 냉혈한처럼 보이는 김주영으로 변신에 성공한 김서형도 또다시 전성기를 맞았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자신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아내의 유혹' 신애리를 비롯해, '자이언트' 유경옥, '샐러리맨 초한지' 모가비, '엄마가 뭐길래' 박서형, '기황후' 황태후, '개과천선' 이선희, '어셈블리' 홍찬미, '굿 와이프' 서명희, '이리와 안아줘' 박희영까지. 김서형은 'SKY 캐슬' 김주영 이전에도 다양한 장르와 역할로 시청자와 만나왔다. 다만 '악역'으로 분류되는 캐릭터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종영 인터뷰차 만난 김서형은 자신을 향한 호평에 고맙다면서도 '평온하다'고 했다. 어쩌면 이해하기 힘든 악역 김주영도, 김서형이 연기했기 때문에 열광적인 반응이 뒤따르는 것 같다는 말에는 "부끄럽다"며 웃었다.
또한, 'SKY 캐슬'은 그가 얼마나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걸 좋아하는지 깨닫게 해 준 소중한 작품이라며, 무엇보다 'SKY 캐슬'에 나온 배우들이 다 같이 빛 보고 있어서 기쁘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 배역을 소개하는 한 인터뷰 영상에서 김주영을 "인간미까지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라고 한 게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후반부로 갈수록 본색을 드러내는 김주영의 모습 때문에, 혹시 배우도 소위 '시놉시스 사기'를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는데.
(대본) 리딩 끝나고 바로 한 거라서 저도 시놉(시스) 안에 나온 것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저도 엄마예요'라고 할 순 없고. (웃음) 제작발표회 때도 우리가 많은 얘기를 못 했다. (그 인터뷰 영상은 드라마) 시작도 전이라서, 내가 (김주영에 관해) 아는 얘기는 그게 전부였다. 감독님한테 들은 얘기는 어쨌든 한서진(염정아 분)과 김주영은 맥락이 같고, 제일 같은 선상에 있는 사람이란 거였다.
어쨌든 김주영도 악마는 아니지 않나. 자식 케어 때문에 생긴 열등감이든 패배감이든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미가 있는 것 아닐까. 악만 있으면 고민과 열등감과 패배감을 어떻게 느끼겠나. 인간미가 그나마 있으니까 김주영에게 연민 갖는 분도 생겼다고 본다. 그 얘기를 한 거다. (웃음)
저는 속았다기보다… 교통사고, 케이(조미녀 분), 남편과의 관계는 알고 있었다. (제) 얘기가 언제쯤 나올지에 대해서는 빨리 나오면 11, 12, 13회에 나온다고 들었는데, 거의 19회에 나오더라. 김주영에 대해서 이젠 뭔가 표현이 되어야 할 텐데 그게 안 나오니까 여쭤보고 싶었지만, 안 여쭤본 게 뭐냐면 감정을 쌓아둬야겠단 생각을 했다.
케이와 어떻게 풀어지고 조선생(이현진 분)과 어떻게 푸는지 몰랐다. (나중에) 작가님이 '답답했을 텐데 어떻게 전화 한 통 안 했냐'고 하셨다. 중간에 한 번 와 보고 싶었다고 하시더라. 작가님도 김주영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혜나(김보라 분)를 (한서진 집에) 들이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다음 행보가 뭐겠나. 한서진이 찾아오든 말든 나는 제자리에 앉아서 수를 두는 거다. 근데 그 패턴이 계속 반복되니 지루해 보이지 않나 싶었다. 그 자체가 나는 재미가 없었다. 그 연기의 완급조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못 찾았었다. 작가님도 혜나 들이고 답답했다고 하시더라.
혜나가 원래 죽는 거였냐고? 사실 저는 시놉시스를 볼 때 캐릭터 설명을 자세히 보지 않는다. 모든 드라마가 그랬다. 제 캐릭터를 추리해내는 게 좋고 얘기를 듣는 게 좋지,그걸 다 알아서 얘기가 흘러나와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힘들어도 안 궁금해했다. 내가 감정 숨기는 여자(역할)인데 한 회를 벌써 안다고 하면 연기를 만들어낼까 봐 약간 걱정도 있었고.
▶ 김주영은 외양도 독특했다. 흐트러짐 없는 올림머리, 검은 옷, 차분하고 조금은 어두운 느낌의 화장까지. 제작발표회에서 '저승사자' 콘셉트라고 짧게 언급한 적이 있는데, 본인이 설정한 것인가.
(김주영은) 감정 표현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캐릭터였다. 평상시에도 블랙을 좋아한다. 옷 입기 쉽지 않은 컬러지만 제일 멋스럽기도 하고 위압감을 줄 것 같은 색. 블랙이 좀 더 수축해서 왜소하게 보이긴 하지만, 한서진을 상대하며 밀당(밀고 당기기)해야 한다면 사실 블랙이 맞지 않을까 하고 제일 간단히 생각한 것 같다. 제일 세련되게 구사할 수 있고, 전문직의 표본이 될 수 있을 거 같아서 블랙을 선택했는데 한번은 화려한 거로 (방향을) 튼 적이 있었다.
저는 뒤로 갈수록 캐슬 (사는) 분들과 어울리는 장면이 있을 줄 알았다. 근데 계속 한서진, 이수임(이태란 분)만 찾아오더라. 화려한 차림이어도 감정을 숨길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임팩트가 있길 바란다고 하셨다. (제) 감정을 드러내려면 (옷에) 색깔을 좀 더 입혀도 된다고 하셨다. 중후반 갈수록 그렇게 됐다. (어느새) 제가 코디(네이션)를 하고 있더라.
머리는 원래 풀고 싶었다. 짧은 머리를 계속 묶고 있어서 힘드니까. 시청률 나오고 분위기 탔을 때 그걸 풀어버리면 그 이유가 뚜렷해야 하는데 계속 코디(역할을)하는 지점이 있어서 화려하게 할 수 없더라. 사무실에서 감정 표현 없고 딱딱한 김주영을 보여줬다면, 일부러 부른 한서진 앞에서는 (입술에) 와인색을 발랐다. 잡아먹을 것처럼. 헤어도 신경 썼고.
▶ 한 자 한 자 삼키는 것 같은, 꾹꾹 눌러 담는 말투를 썼다.
처음에는 잘못하면 사극 톤이 될 수 있는 대사가 있어서 어떻게 잡을까 고민하다가 외모(설정)를 먼저 잡았다. 스타일 잡고 나니까 로봇 연기를 해 보자 싶었다. 초반에는 모퉁이 걸어갈 때도 백이 안 흔들리게 걸었다. 감정 표현될 때는 조금 흔들어도 상관이 없는데 (초반은 감정이 잘 나오지 않으니) 가방을 많이 안 흔든다. 모퉁이도 딱 각지게 돌고 앉아있었다. 손도 (탁자 위에) 안 올렸다. (앉은 자세를 보여주며) 처음에는 제가 이렇게 앉았다, 딱딱하게. 손을 쓰는 순간 감정 표현이 많이 될까 봐 자제를 많이 했다. (김주영의 감정이) 표현되기 시작하면서는 달라졌지만. 밥집에 가도 전 뭘 못 먹었다. 커피를 마시지도 못했다. 컵을 입에서 떼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 했다.
아, 그 장면? 그날 유독 탑 조명이 안 보였나. 저도 그렇게 눈동자까지 까맣게 나올지 몰랐다. 흰자가 안 보였다고 하더라. 많이들 물어봤는데, 아마 조명을 좀 더 비껴가게 찍었나. (웃음) 명상실은 늘 똑같이 위에서 아래로 찍었다. '사랑해, 예서야'란 대사는 원래 없었다. 감독님이 이 장면에서 예서에게 뭔가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냐면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하더라. '사랑해, 예서야 할게요' 하니 그거 좋다고 하셨다. 이미 예서와 주영이 쌓아놓은 게 많았고, 예서를 한서진에게 떨어뜨려 놓는 상황이었을 것 같다. 스티커 사진도 찍고 레스토랑도 갔으니 '사랑해, 예서야' 해도 상관없는 사이라고 봤다.
▶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혜나를 들이셔야 합니다' 등 김주영의 대사는 가장 자주 패러디됐다. 본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무엇이었나.
"그렇게 기다려주는 게 부모 아닙니까". 이 드라마가 전반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라고 봤다. 그 대사 하면서 울컥했고.
▶ 하루 쉬고 방송된 19회가 조금 아쉬웠다는 평을 받았다. 그런데도 김주영과 케이의 장면에 몰입해서 봤다는 반응이 많았다.
한서진과 강준상(정준호 분)이 무릎 꿇고 나서 우리 얘기가 나와서 (감정이) 폭발한 게 아닐까. 그래서 케이 이야기가 폭발력이 생긴 게 아닐까. 우리도 (그동안) 해소한 게 없다 보니까 사람들이 더 많이 울어주었던 것 같다. 작가님이 노린 게 아닐까. (웃음) 우리를 아끼고 아껴놓은 게 그런 의미인가 싶기도 했다.
남편 교통사고 건은 감독님이 말씀해주셔서 알았는데, 19회 때 페어팩스에서 조선생이 마약 했다는 얘기가 나온 거다. 이걸 수습하기가 힘들었다. 페어팩스에서 마약을 팔았다고? 그리고 조선생 이름이 태준이었구나. (조선생을) 어떻게 만나 무슨 관계였을지 저도 궁금했는데 19회에야 알았다. 그래서 좀 벅찼다. 케이와 하는 것도 너무 벅찬 씬이었고. 항상 지켜만 보면서 묻어뒀던 걸 갑자기 케이와 폭발해내야 하는 거니까 얼마나 에너지가 들었겠나. 그래서 힘들었다.
▶ 조현탁 감독이 현장에서 배려를 많이 해 줬다고 들었다.
한서진과 대화하는 씬에서 원래는 그냥 한서진 얼굴에서 끝나도 되는 장면인데 제가 핸드폰 들고 걸어갔다 오는 거로 마무리해주신 게 있다. 이건 지문에 없는데 그만큼 내 연기를 다 따라와서 그걸(장면을) 다 쓰신 거다. 그만큼 배우의 연기를 끝까지 보신다. 그러니까 신나는 거다. (김주영 캐릭터가) 답답하고 외로워도 현장 가면 즐기게 되니까. 카메라 돌면 200% 잘해주신다. 감독님이 있어서 제가 했지, 저도 힘들었다. 내가 카메라를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다. 연기하면 다 찍고 한참 보시다가 컷하신다. 촬영감독님도 그렇다. 그러니 힘들어하면서도 연기를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어쨌든 (김주영이) 구치소는 가게 되지 않나. 잡혀가는 거로 20회 끝나게 되나 고민했는데 19회에서 구치소를 보내더라. 20회는 어떻게 되려나. 20회는… 내가 (인터뷰에서) 다 얘기했는데. (웃음) 얘기한 거에 답이 다 있다. '부모 아닙니까!' (웃음) <계속>